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12358

동백의 배경 /김나연

동백의 배경 김나연 남쪽 끝 섬에 와서야 알았네 당신이 내 배경인 줄 오동도에는 붉은 동백이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목을 꺾어 뛰어내리며 화려한 꽃물을 들이고 있었네 푸른 잎사귀 사이사이 동백꽃과 지상의 동백꽃이 어우러져 섬은 불타고 바닷바람은 먼 데서 오는 봄소식을 실어 날랐네 사랑나무는 마음을 기대듯 서로 몸을 포개고 있었지 동백이 미련을 버린 자리에 윤기 나는 검푸른 잎사귀 반짝였네 나는 내가 나인 줄 알았는데 당신이 있어 내가 있는 줄 알겠네 동백꽃이 미련 없이 뛰어내린 건 사시사철 푸른 배경이 되어 주는 잎사귀가 있었기 때문 내게도 배경이 되어 주는 당신이 있어 내가 빛날 수 있음을 이제야 알겠네 ―반년간『시에티카』(2023년 상반기호)

뒤집힌 거북이 보면 도와줘야 할까요 /박세랑

뒤집힌 거북이 보면 도와줘야 할까요 박세랑 오빤 나한테 기분 풀라면서 소 곱창을 사줬어 전직 대통령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들른 식당이래 고작 3인분밖에 못 먹었는데 이십만 원이 훌쩍 넘었어 멱살 잡고 짤짤 흔들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어 이 돈이면 오천 원짜리 김밥이 몇 줄이야 밀린 가스비도 3달 치나 갚고 통신비에 관리비에 아, 몰라 몰라 구질구질하게 가성비나 따져대는 내 위장은 자꾸 약해져서 사람 구실도 못 하겠는데 소 곱창은 질긴 고무줄처럼 도통 소화가 안 되고 짝퉁인지 진퉁인지 롤렉스가 번쩍이는 너보단 내가 더 많이 집어먹어야 직성이 풀리겠는데 몸도 영혼도 다단계에 저당 잡힌 엄마가 자취방에 들이닥친 지 이틀째 되던 날, 기숙사 살던 남동생이 방학이라 오갈 데가 없다며 문을 두드렸어 세 살 터울 언니..

집이 운다 /한진현

집이 운다 한진현 한옥 한 채 지어놓고 기둥에 기대어 앉아 있으면 집이 스스로 고쳐 앉으며 울음을 뱉는다 그것은 관절이 꺾이는 신음 같은 울음이다 집의 울음이 있기 오래전에 나무는 저 혼자 충분히 울었다 산판에서 울었고 제재소에서 울었다 그 울음을 알아주는 목수의 거친 손바닥에서 한 번 더 울었다 백골*의 집이 운다 저 울음 끝에 시린 발이 따뜻하겠다 * 백골 : 한옥에서 단청이나 도색하지 않은 집 ㅡ시집 『비가 오니 용서하기로 했다』(두엄, 2023)

미루나무 각시 /이연숙

미루나무 각시 이연숙 여우 꼬리만큼 작은 햇살을 품고 있는 내 등에 그녀가 내게로 와서 보드라운 체온 던지며 눈 감고 서 있다 가만히 있어도 흐르는 그녀의 슬픔이 나를 투과해 강물 위에 널어놓은 듯 물 위에 결이 생긴다 지나다 그녀는 불쑥 나를 찾곤 한다 느닷없이 불현듯 기습처럼 네가 그리웠어, 라며 허겁지겁 나를 안는다 어느 추운 겨울날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나를 찾아온 적도 있다 강둑에 선 친구들이 와 와하며 떠내려가는 유빙(流氷)에 소란스러울 적에도 마치 혼자 온 것처럼 저만치 서 있었다 잎 달고 잎 떨구고 잎 달고 잎 떨구고 그렇게 나 홀로 세월을 펄럭일 동안에도 그녀의 눈길은 늘 저 어디쯤 빈 곳을 보고 있다 차라리 그녀 내 곁 한 그루 나무로 세워졌으면 ―『시와소금』(2023, 봄호)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 ― 내게 사랑이 있었네① /오태환​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 ― 내게 사랑이 있었네① 오태환 ​ 내게 사랑이 있었네 봄이 와서 허천나게 꽃이 피면, 벌서듯이 서서 그대를 생각하는, 수척한 사랑이 있었네 ​ 종아리를 걷고, 허천나게 꽃이 피면 꽃으로 매 맞고 싶은 사랑이 있었네 꽃으로, 꽃째로 매 맞으며 환하게, 아프게 그대 쪽으로 새는 마음이 있었네 봄이 와서 허천나게 꽃이 피어서, 한사코 그대 쪽으로 새는 몸이 있었네 내게 그대 쪽으로, 수척하게 새기만 하는 슬픈 몸이 있었네 ​ ―시집『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황금알, 2019)

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입니다 /원춘옥

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입니다 원춘옥 밥상에 앉은 다혈질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숨 죽은 콩나물처럼, 시금치처럼 여자는 “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임”이라고 눈으로 쓴다 밥상에 앉은 남자가 여자를 쏘아본다 여자는 묵묵히 사골 찜솥을 준비한다 이 국물만 고아 내면 서로의 간도 맞는 맞춤형이 되겠지 남자는 양푼 가득 마늘을 담아와 까기 시작한다 매운 냄새가 서로의 관계처럼 자극한다 남자도 “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임” 집안 분위기로 쓴다 누가 초식형이었는지 누가 육식형이었는지 알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에는 깐 마늘만 수북이 쌓여있는 ―시집「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입니다」(상상인, 2023)

큰오빠 /이연숙

큰오빠 이연숙 낮에 돼지죽 좀 주니라 아버지 장에 가시던 날 큰오빠 펄펄 끓는 물 줘서 돼지 다 죽었다지 포도나무에 거름 좀 주라하면 똥바가지 나르다 엇박자에 휘청 똥물 다 뒤집어 썼다지 도리깨로 콩 털라 하면 도리깨 맴맴 돌아 얼굴 찢겨 병원 가 꼬맸다지 그러면서도 겁은 또 겁나 많아 자는 여동생 깨워 뒷간에 세웠다지 갈래머리 동생 생일에 극장 구경 시켜 주마고 버스타고 한 시간 송림동 현대극장 데려가더니 자봐라 극장이다 극장 간판만 보여주고 다시 집에 왔다지 오빠야 생일 축하해 울 큰오빠 환갑 되었네 생일 선물로 동상이 극장 보여줄까 현대극장 그냥 있던데 ―『시와소금』(2023, 봄호)

여우 /류인서

여우 류인서 재 하나 넘을 적마다 꼬리 하나씩 새로 돋던 때 나는 꼬리를 팔아 낮과 밤을 사고 싶었다 꼬리에 해와 달을 매달아 지치도록 끌고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꽃을 샀다 새를 샀다 수수께끼 같은 스무고개 중턱에 닿아 더이상 내게 팔아먹을 꼬리가 남아 있지 않았을 때 나는 돋지 않는 마지막 꼬리를 흥정해 치마와 신발을 샀다 피 묻은 꼬리 끝을 치마 아래 감췄다 시장통 난전판에 핀 내 아홉 꼬리 어지러운 춤사위나 보 라지 꼬리 끝에서 절걱대는 얼음 별 얼음 달이나 보라지 나를 훔쳐 나를 사는 꼬리는 어느새 잡히지 않는 나의 도둑 당신에게 잘라준 내 예쁜 꼬리 하나는 그녀 가방의 열쇠고리 장식으로 매달려 있다 ―시집『여우』(문학동네, 2023)

의자 /이돈형

의자 이돈형 헌 집 같은 의자에 앉아 헌 집에 든 바람 같은 아버지가 담배를 태우신다 어쩌다 또 한 대 태우신다 공복에 태우는 담배 맛은 정든 소멸처럼 애태움을 가시게 해 내뿜는 연기가 생의 뒷주머니 같은 골목에 퍼지다 종일 담벼락을 옮겨 다니며 중얼거린 의자의 그림자에 가 앉는다 어쩌다 하루란 게 있어 의자는 허虛의 혈穴을 찾아 하루치 삭고 아버지는 하루치 삶을 개어놓는다 어둑한 골목의 기색을 덮고 있는 두 그림자 위로 석양이 쇳물처럼 쏟아진다 아무데서나 문드러지기 좋은 저녁 아버지 의자에 앉아 소멸만 내뿜는다 내뿜어도 자꾸 생을 일러바치듯 달라붙는 정든 소멸은 무얼까? 아버지, 담배 맛이 그리 좋아요? ㅡ반년간 《상상인》(2023, 1월), 제3회 선경문학상 수상작 중

시계의 아침 /최문자

시계의 아침 최문자​ ​ 가끔 ‘정의’ 라는 말 두꺼운 텍스트 속에서 읽는다 내게 시간이 잘 도착하는 시계가 있다 내것 아닌 감정으로 시계는 가고 있다 나는 그 때 일을 시계에게 말하려고 했다 시계의 얼굴이 하얗다 질려있다 내가 나쁜 손을 잡으면 시계가 죽었다 나를 발견하듯이 깜짝 놀라며 시계를 발견한다 시계를 들여다 본다 12시였다 지난 토요일도 시계는 한 번 죽었었다 죽음 후, 숫자 1에서 12개의 뼈가 휘어져 있다 숫자 2는 1을 떠안고 까마득한 자전의 길을 떠난다 네가 나였으면 좋겠어, 네가 그 냥 너였으면 좋겠어 두 가지 감정의 바늘이 갈길 가면서 정하지 못하고 있다 숫자 1과 숫자2 사이 좁은 허공에서 조금 늦거나 조금 빠른 시간이 웃고 또 웃는다 한때 나는 자주 웃던 무례한 시계를 강변에 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