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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의 배경 /김나연

동백의 배경 김나연 남쪽 끝 섬에 와서야 알았네 당신이 내 배경인 줄 오동도에는 붉은 동백이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목을 꺾어 뛰어내리며 화려한 꽃물을 들이고 있었네 푸른 잎사귀 사이사이 동백꽃과 지상의 동백꽃이 어우러져 섬은 불타고 바닷바람은 먼 데서 오는 봄소식을 실어 날랐네 사랑나무는 마음을 기대듯 서로 몸을 포개고 있었지 동백이 미련을 버린 자리에 윤기 나는 검푸른 잎사귀 반짝였네 나는 내가 나인 줄 알았는데 당신이 있어 내가 있는 줄 알겠네 동백꽃이 미련 없이 뛰어내린 건 사시사철 푸른 배경이 되어 주는 잎사귀가 있었기 때문 내게도 배경이 되어 주는 당신이 있어 내가 빛날 수 있음을 이제야 알겠네 ―반년간『시에티카』(2023년 상반기호)

뒤집힌 거북이 보면 도와줘야 할까요 /박세랑

뒤집힌 거북이 보면 도와줘야 할까요 박세랑 오빤 나한테 기분 풀라면서 소 곱창을 사줬어 전직 대통령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들른 식당이래 고작 3인분밖에 못 먹었는데 이십만 원이 훌쩍 넘었어 멱살 잡고 짤짤 흔들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어 이 돈이면 오천 원짜리 김밥이 몇 줄이야 밀린 가스비도 3달 치나 갚고 통신비에 관리비에 아, 몰라 몰라 구질구질하게 가성비나 따져대는 내 위장은 자꾸 약해져서 사람 구실도 못 하겠는데 소 곱창은 질긴 고무줄처럼 도통 소화가 안 되고 짝퉁인지 진퉁인지 롤렉스가 번쩍이는 너보단 내가 더 많이 집어먹어야 직성이 풀리겠는데 몸도 영혼도 다단계에 저당 잡힌 엄마가 자취방에 들이닥친 지 이틀째 되던 날, 기숙사 살던 남동생이 방학이라 오갈 데가 없다며 문을 두드렸어 세 살 터울 언니..

흙수저 /전연희

흙수저 전연희 언덕을 돌아들면 낮은 담장 학교였다 잔디 속 삘기 찾고 솔 순도 맛보는 길 진달래 환한 꽃무리 맨 가슴에 번졌다 보리밭 깜부기도 둔덕에 냉이꽃도 개울가 미루나무 그 환한 반짝임도 조약돌 자잘한 노래 종달새와 벗하던 싱싱한 풀밭 같다 아직 나를 이르는 말 흙수저 맨손으로 들 품에서 자란 덕분 그 풀꽃 내게서 자라 그 향기 잊지 않거니 ―『시와소금』(2023, 봄호)

집이 운다 /한진현

집이 운다 한진현 한옥 한 채 지어놓고 기둥에 기대어 앉아 있으면 집이 스스로 고쳐 앉으며 울음을 뱉는다 그것은 관절이 꺾이는 신음 같은 울음이다 집의 울음이 있기 오래전에 나무는 저 혼자 충분히 울었다 산판에서 울었고 제재소에서 울었다 그 울음을 알아주는 목수의 거친 손바닥에서 한 번 더 울었다 백골*의 집이 운다 저 울음 끝에 시린 발이 따뜻하겠다 * 백골 : 한옥에서 단청이나 도색하지 않은 집 ㅡ시집 『비가 오니 용서하기로 했다』(두엄, 2023)

코스모스 /김사인 - 겨울 우포 /김주대

코스모스 김사인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ㅡ시집『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6) -------------------------------- 겨울 우포 김주대 언 살 수면을 찢어 늪은 새들의 비상구飛上口를 만들어 놓았다 출렁이는 상처를 밟고 새들이 힘차게 작별한 뒤에도 늪은 밑바닥까지 울던 새들의 발소리 기억하며 겨우내 상처를 열어 두었다 고향을 힘차게 떠난 우리는 언제 어머니 상처에 돌아갈 수 있을까 ㅡ『시와사람』 (2023, 봄호)

미루나무 각시 /이연숙

미루나무 각시 이연숙 여우 꼬리만큼 작은 햇살을 품고 있는 내 등에 그녀가 내게로 와서 보드라운 체온 던지며 눈 감고 서 있다 가만히 있어도 흐르는 그녀의 슬픔이 나를 투과해 강물 위에 널어놓은 듯 물 위에 결이 생긴다 지나다 그녀는 불쑥 나를 찾곤 한다 느닷없이 불현듯 기습처럼 네가 그리웠어, 라며 허겁지겁 나를 안는다 어느 추운 겨울날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나를 찾아온 적도 있다 강둑에 선 친구들이 와 와하며 떠내려가는 유빙(流氷)에 소란스러울 적에도 마치 혼자 온 것처럼 저만치 서 있었다 잎 달고 잎 떨구고 잎 달고 잎 떨구고 그렇게 나 홀로 세월을 펄럭일 동안에도 그녀의 눈길은 늘 저 어디쯤 빈 곳을 보고 있다 차라리 그녀 내 곁 한 그루 나무로 세워졌으면 ―『시와소금』(2023, 봄호)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 ― 내게 사랑이 있었네① /오태환​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 ― 내게 사랑이 있었네① 오태환 ​ 내게 사랑이 있었네 봄이 와서 허천나게 꽃이 피면, 벌서듯이 서서 그대를 생각하는, 수척한 사랑이 있었네 ​ 종아리를 걷고, 허천나게 꽃이 피면 꽃으로 매 맞고 싶은 사랑이 있었네 꽃으로, 꽃째로 매 맞으며 환하게, 아프게 그대 쪽으로 새는 마음이 있었네 봄이 와서 허천나게 꽃이 피어서, 한사코 그대 쪽으로 새는 몸이 있었네 내게 그대 쪽으로, 수척하게 새기만 하는 슬픈 몸이 있었네 ​ ―시집『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황금알, 2019)

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입니다 /원춘옥

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입니다 원춘옥 밥상에 앉은 다혈질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숨 죽은 콩나물처럼, 시금치처럼 여자는 “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임”이라고 눈으로 쓴다 밥상에 앉은 남자가 여자를 쏘아본다 여자는 묵묵히 사골 찜솥을 준비한다 이 국물만 고아 내면 서로의 간도 맞는 맞춤형이 되겠지 남자는 양푼 가득 마늘을 담아와 까기 시작한다 매운 냄새가 서로의 관계처럼 자극한다 남자도 “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임” 집안 분위기로 쓴다 누가 초식형이었는지 누가 육식형이었는지 알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에는 깐 마늘만 수북이 쌓여있는 ―시집「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입니다」(상상인, 2023)

큰오빠 /이연숙

큰오빠 이연숙 낮에 돼지죽 좀 주니라 아버지 장에 가시던 날 큰오빠 펄펄 끓는 물 줘서 돼지 다 죽었다지 포도나무에 거름 좀 주라하면 똥바가지 나르다 엇박자에 휘청 똥물 다 뒤집어 썼다지 도리깨로 콩 털라 하면 도리깨 맴맴 돌아 얼굴 찢겨 병원 가 꼬맸다지 그러면서도 겁은 또 겁나 많아 자는 여동생 깨워 뒷간에 세웠다지 갈래머리 동생 생일에 극장 구경 시켜 주마고 버스타고 한 시간 송림동 현대극장 데려가더니 자봐라 극장이다 극장 간판만 보여주고 다시 집에 왔다지 오빠야 생일 축하해 울 큰오빠 환갑 되었네 생일 선물로 동상이 극장 보여줄까 현대극장 그냥 있던데 ―『시와소금』(2023,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