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피*의 하루 /장영춘 구피*의 하루 장영춘 온종일 어항 속 태평양을 건너듯 출구 없는 레일 위를 돌리고 돌려도 또다시 제자리걸음 그물 속에 갇힌 오늘 한때는 네 어머니도 종종걸음치셨지 한여름 용천수에 발 한번 담글 새 없이 어머니 움푹 팬 발자국 이끼처럼 떠 있는 저들도 속수무책,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저출산 막대그래프 눈금을 채워가듯 한 달이 멀다 하고는 쏟아내는 새끼들 *구피 : 열대어 ―『시와소금』 (2022, 겨울호)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2023.02.15
당신堂神을 찾던 당신 –해안동, 동당 /장영춘 당신堂神을 찾던 당신 –해안동, 동당 장영춘 누구의 손길이었나 근원을 찾던 발길 미끄덩 넘어지며 무심의 단죄를 받듯 풀더미 허리 헤치며 길 없는 길을 간다 아침 이슬 밟으며 당신堂神을 찾던 당신 지성으로 빌었던 간절함도 녹이 슬어 다 식은 제단 둘레에 표지석 하나 없는 당신堂神은 거기 있는데 당신은 거기 없고 덩그러니 하늘 향해 손 내밀던 팽나무 아래 해안동 하르방당에 상사화꽃 피었다 ―『시와소금』 (2022, 겨울호)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2023.02.15
간절기 /채종국 간절기 채종국 헨델의 아리아를 듣는 아침 봄눈처럼 어색한 말을 하는 아침 마스크를 벗고 가지에 싹 튼 권태를 읽는다 권태라는 것은 봄이 올 수도 있다는 말의 또 다른 텍스트 나른한 온기에 꼬리를 감춘 고양이처럼 담장 너머 숨어버린 검은 모습의 겨울 애상을 찾는다 네모 난 새의 울음 눈 속에 갇히고 허공에 걸려있는 부음 같은 햇살 몇 줄 저를 구원하라며 봄을 기다리는 가녀린 나무의 간절한 손처럼 봄은 곧 부르짖는 자의 응답이라 하지만 바람 한 점 없는 겨울 아침 시퍼런 하늘은 그러한 간절도 모르는 채 나무의 마른 기도를 태우는 중이다 ―웹진『시인광장』(2023, 2월호)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2023.02.15
오렌지에게 /최문자 오렌지에게 최문자 사랑할 때는 서로 오렌지이고 싶지 먼 곳에서 익고 있는 어금니가 새파란 이미 사랑이 끝난 자들은 저것이 사랑인가 묻는다 슬픈 모양으로 생긴 위험하게 생긴 느린 비가 부족해서 파랗게 죽을 지도 모르는 저것 사랑하기에 좋도록 둥근, 바람에 대해 쓰러지기 좋은 죽기에도 좋은 저것 우리는 쓰러지기도 전에 겁이 나서 오렌지는 너무나 굳게 오렌지를 쥐고 나는 어디에도 없는 나를 쥐고 짐승처럼 나빠지고 싶은 오 두려운 여름, 거짓으로 빚어지는 둥그런 항아리 같은 저것 저것의 안을 깨뜨리며 죽었던 여름이 우리를 지나갔다 ―웹진『시인광장』(2019, 3월호)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2023.02.15
고욤나무 /김정임 고욤나무 김정임 키 큰 고목에 닥지닥지 열렸던 작은 씨 열매 대추처럼 매달려 검붉게 영글어가는 고욤나무 작은 몸속에 씨앗을 품어 우수한 유전자를 전하기 위해 매서운 세상에 맞섰다 생명이란 한 생애를 와서 본연의 책임을 다하고 다음 세대를 위해 텃밭을 일구어 두고 홀연히 떠나는 것 유전자로 꽉 채워 붉어질 수도 없는 고욤나무의 삶이 열정으로 터질 듯하다 ―시집『바다로 간 낙타』해설(그림과책, 2003)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2023.02.15
부메랑 /김정임 부메랑 김정임 누군가는 행복한 일상을 또 누군가는 시련의 오늘을 살아내고 한없는 기쁨과 슬픔의 교차로에 환희와 눈물의 쌍곡선을 타고 인내라는 이름의 힘겨운 나날 심연의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내 편의 나를 한없이 질책하다가 원망의 화살 날려보았다 아 아 그것은 나를 겨냥한 아픈 삼지창이었다는 걸 마루타의 처참한 최후처럼 심장에 찍힌 상처가 발등 찍으며 소리 없는 눈물 쏟아내고 있다 ―시집『바다로 간 낙타』해설(그림과책, 2003)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2023.02.15
내림굿 ―나의 나타샤 에게 /성국희 내림굿 ―나의 나타샤에게 성국희 몸부림도 소용없이 받고야 말 병이었죠 거부하던 시간만큼 더 옥죄는 가슴앓이 아 당신 내 안에 모셔 불 밝혀야 살 수 있죠 ― ᄒᆞᆫ결시조 19『《꽃에 맞서다』(목언예원, 2022) 시조♠감상해 보자 2023.02.14
새를 가둔 항아리 /임희숙 새를 가둔 항아리 임희숙 무서워요 발톱이 걸렸어요 누가 발가락을 물고 놓아주질 않아요 알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죠 깨뜨리겠어요 항아리 작고 겸손한 부리라고 얕본 거죠 침묵하는 부리가 얼마나 험악한지 모가지가 독사를 닮았다는 걸 잊으셨나요 백자청화봉황무늬 항아리 나를 가둔 손가락을 분지르고 뱀의 모가지로 칭칭 감아버리려구요 유리질이 녹아내려 날개가 젖네요 까짓 그래도 부수고 말거에요 내동댕이쳐야죠 드디어 나는 떠납니다 안녕 이런, 날개가 젖었다는 걸 깜빡했어요 항아리를 깨뜨리라고 파괴해야 한다고 제발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 유약에 젖은 발톱이 녹아내리고 있어요 죽어야만 깨지는 알이라면 까짓 그런데 내가 죽으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거죠 항아리 밖의 세계는 어디에 있나요 대답해요 당장 ..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2023.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