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읽고 -수필 329

도시가 키운 섬―감천마을 /최삼용

도시가 키운 섬 ―감천마을 최삼용 비탈길 뒤뚱이며 기어 오른 마을버스에서 내려 까마득한 돌계단을 터벅터벅 오르면 마주 오는 사람 비켜가기 위해 잠시 된숨 놓아도 되는 그래서 노곤이 땟물처럼 쩔어진 골목은 이웃집 형광등 불빛까지 남루가 고인 저녁을 달랜다 액땜인 양 보낸 하루로 얻어진 고단을 눕이려 정처에 들면 허기를 부은 양은냄비의 끓는 물속에서 울혈 닮은 라면 스프 물 붉게 우러나고 몸집 부푼 면발 따라 가난의 죄까지 부풀린다 하느님과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서 살기에 믿음 약해도 하느님을 빨리 만날 것 같은 도시가 키운 섬 거기에 가난과 실패를 혹은 죄 없는 꿈을 혀끝에 단 채 휘황한 도심 발치에 두고 가난을 품앗이한 우리가 산다 ―시집『그날 만난 봄 바다』(그루, 2022) 홀로 산행을 하며 삼각산..

매미 /김미선

매미 김미선 구애의 노래는 울음은 가깝다 백일홍 붉은 가지에 스치는 저 소리 백종이 머잖은 길에 영혼의 절규로 들리네 파도 타듯 너울거리는 저 소리의 뒤안길 느티나무에 벗어놓고 간 헌 옷 한 벌 몸이 빠져나간 뒤 바람에 날아갈 듯 깃발로 흔들리는 텅 빈 손 ―시집『바위의 꿈』(시와반시, 2022) --------------------------- 매미는 종에 따라 짧게는 3년 5년 7년 13년을 애벌레로 땅속에서 나무뿌리의 액을 먹고 살다가 지상에 나와 약 한 달간 머무르다 생을 마친다고 한다. 매미가 이렇게 주기로 나오는 것은 새, 다람쥐, 거북, 두꺼비, 거미, 고양이, 개 심지어 물고기까지 매미를 잡아먹는 천적에 대응하기 위한 생존전략의 방식이라고 한다. 미국 동부지역에는 17년을 주기로 나타타는 ..

일인칭의 봄 /이명숙

일인칭의 봄 이명숙 꽃이 피겠다는데 막을 수 있겠어요 아까시꽃 찔레꽃 아직 피우지 못한 언어는, 어느 먼 생의 입술에서 필까요 꽃들 망막에 꽂힌 흰빛 푸른빛 사이 서로 다른 오늘의 왼눈 오른눈 사이 간 봄의 볕에 타버린 혀의 뿌리 찾아서 꽃이 지겠다는데 막을 수 있겠어요 검은 숲에 버려져 스마트만 진심인 우리는, 어느 천년 후 여기 다시 올까요 불두화 합장하는 그렇고 그런 봄날 귀 적시는 소리에 그저 우연이란 듯 서운암 꽃자리마다 술렁이는 눈빛들 ㅡ부산시조 통권 50호 기념시조집 『서운암, 시조에 물들다』(부산시조시인협회, 2021) ㅡ시조집『튤립의 갈피마다 고백이』(문학들, 2022) ----------------------- 시의 제목이 일인칭의 봄이다, 이인칭도 있고 삼인칭도 있는데 왜 하필 일인칭..

산수유 그 여자 /홍해리

산수유 그 여자 홍해리 눈부신 금빛으로 피어나는 누이야 네가 그리워 봄이 왔다 저 하늘로부터 이 땅에까지 푸르름이 짙어 어질머리 나고 대지가 시들시들 시들마를 때 너의 사랑은 빨갛게 익어 조롱조롱 매달렸나니 흰눈이 온통 여백을 빛나는 한겨울, 너는 늙으신 어머니의 마른 젖꼭지 아아, 머지않아 봄은 또 오고 있것다. ―월간『우리詩』(2022, 5월호) ------------------------- 산수유꽃과 생강나무꽃은 비슷하다. 진달래보다도 더 일찍 피는 눈 속의 매화나 동백 말고는 초봄에 가장 먼저 피우는 것도 같다. 그러나 비슷하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왜냐하면 산수유꽃, 생강나무꽃은 우선 색깔이 노랗고 멀리서 보면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산에서는 산수유를 볼 수가 없고 생강나무는 깊은 산..

경전 1 /이태호

경전 1 이태호 언젠가 난 어렵사리 맹자 7편을 읽었고 지금은 갈피 닳은 '아내'를 읽는 중이네 필생을 두고 다 못 읽은 책이 또 있네 '어머니' ㅡ시조집「달빛 씨알을 품다」(청어, 2022) 우리 어머니는 딸을 낳지 못하고 아들만 셋을 두었는데 그래서 내가 나서 자라던 우리 집에서는 여자라고는 엄마밖에 없었다. 집안에서 여자의 정취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다 보니 여자는 내게 있어 늘 머나먼 미지의 세계처럼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먼 동산에 피어오르는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보이기는 보이나 만질 수는 없었고 가까이는 가보고 싶은데 가까이할 수도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그저 맘속 깊이 간직한 보석처럼 여자란, 여신처럼 신성하고 신비한 존재여서 함부로 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꽃에서 사는 어여쁜 요정처럼 향..

눈 온 날 저녁 /박창기

눈 온 날 저녁 박창기 이웃 일 도우러 갔던 아내가 무서울까 봐 늦게 오는 가로등 불빛 대신 마중 나간다 오늘은 예정에 없던 과메기를 깐 덕으로 반주 안주로 안성맞춤이라 여겼는데 촉촉한 꼬리 부분은 잘 먹는다 미용에 좋다고 건강에 좋다고 그리 꼬셨건만 꼬들한 꼬리 부분 외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쌈 싸서 잘 먹는다 허락된 소주 두 잔으로 잉여 과메기를 처리하기엔 그렇고 해서 눈치를 본다 따뜻한 눈빛을 얹어 바라보면 혹여 보시라도 있을까 기대해 보는 것이다 이따금 배려를 받는 날은 불콰한 술맛이 두 배로 늘어난다 아내의 대단한 선심에 나는 그만 흐뭇해져 ‘나 무엇이 될꼬하니’ 라는 풍류로 응답한다 나를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하려고 애쓰는 아내의 관심 이승에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더 열심히 더 사랑해야겠다는..

아버지의 들녘 /안규례

아버지의 들녘 안규례 어쩌까 어쩌실까 구순의 울 아부지 올해도 또 손수 지으신 농산물 보내셨네 이 폭염 이 염천에 구부러진 허리로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거친 손 눈에 보이네 해마다 올해만 올해만 하시더니 이러다가 내 손 대신 일손 잡고 돌아가시것네 젊은 날엔 탄광에서 석탄 가루 반찬 삼아 드시고 환갑이 지난 자식 지금도 품고 계시네 복중 뙤약볕 피한다고 새벽이슬 밟으며 풀 뽑고 거름 놓아 길러 땄을 옥수수, 감자, 콩, 검은 봉지에 10남매 얼굴도 같이 넣어 봉다리 봉다리 꽁꽁 잘도 싸매셨네 예나 지금이나 야물딱진 울 아버지! ―시집『눈물, 혹은 노래』(도서출판 청어, 2021) ---------------- 고향과 사랑과 어머니는 시의 진부한 소재가 된 지 이미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시인..

흔적―대상포진 /박숙경

흔적 ―대상포진 박숙경 압축된 잠복기가 풀리면서 꽃의 비명이 바람에 실려 왔다 저, 출처 불분명의 레드카드 낯선 내가 뾰족이 돋았다 자정 부근에서야 어둠의 모서리에 오른쪽의 통증을 앉힌다 낡은 자명종 소리가 명쾌하게 번지면 조각난 봄의 퍼즐이 방안 가득 흩어지고 나는 다시, 나를 앓는다 칼날 같이 깊은 밤 공복의 위장이 허기를 바깥으로 출력하면 소원은 자주 초라해지고 미완의 날개는 천칭자리와 사수자리 사이쯤에 엉거주춤, 지독한 사랑은 오른쪽 등에서 태어나 겨드랑이를 가로질러 명치끝에서 머문다 ㅡ시집『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시인동네, 2021) 대상포진의 초기 증상은 감기와 비슷하다고 한다. 두통이 오고 몸살 난 것처럼 팔, 다리가 나른하고 쑤신다고 한다. 건강할 때는 숨어 있다가 피로가 쌓이거..

선운사 동백 /이이화

선운사 동백 이이화 햇살 노랗게 만개하는 춘삼월에는 선운사 육덕 좋은 절집 여인네 부처님의 엄중한 눈길 피해 새빨간 립스틱으로 치장하고 사랑을 안다고 큰소리치는 전국의 사내들을 불러 모은다지 봄바람으로 살랑대는 마음 들킬까 복분자주 술잔 속에 불콰하게 감추고 장어구이 안주빨이 힘 좋게 불뚝거리면 새빨갛게 농익은 입술 훔치고 싶은 사내들 안달복달이 난다지 줄 듯 말 듯 아찔하게 애간장 녹이다 매몰차게 거절하는지 저 요염 앞에 헛물만 켜던 못난 자존심이 머리 위에 내려앉는 노을 향해 삿대질해 대다가 내년을 기약하고 돌아선다지 ―시집『칸나가 피는 오후』(그루, 2021) ------------------------------다시 가보고 싶은 선운사------------------------- 선운사는 사찰로 ..

대추나무 꽃 /나병춘

대추나무 꽃 나병춘 대추나무는 게으르기 짝이 없다 봄에는 가장 늦게 새 연두 잎사귈 피운다 쬐끄만 꽃들은 보일락 말락 향기도 풍길락 말락 하지만 추석 무렵에 보면 태풍 장마도 이긴 싱싱한 열매들 태양의 힘을 뽐내듯 제법 토실 토실하다 작은 꼬추가 맵다더니 호동그란 대추 알맹이 속에 해와 달, 무수한 별들이 반짝반짝 숨쉬고 있다 ―시화집『꽃』(한국시인협회, 2020) ---------- 꽃마니아도 아니면서 산에 가면 꽃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꽃이 이쁘기도 하거니와 그보다 꽃 이름이 궁금하였던 것이다. 산골에서 태어나서 수많을 들꽃을 보고 자랐지만 꽃이 크고 화려한 꽃에만 눈길을 주었지 작은 풀꽃들은 발에 밟히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쩌다가 도시에 살게 되면서 등산을 하게 되면서 시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