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읽고 -수필 329

시를 쓰고 있는데 /권이영

시를 쓰고 있는데 권이영 내가 시를 쓰고 있는데 아내는 베란다 화초에 물이나 주라고 하네 내가 시를 쓰고 있는데 아내는 은행이나 다녀오라고 하네 내가 시를 쓰고 있는데 아내는 슈퍼마켓에나 다녀오라고 하네 내가 시를 쓰고 있는데 아내는 설거지나 도와 달라고 하네 내가 시를 쓰고 있는데 아내는 화장실 청소나 하라고 하네 아니, 도대체 내가 지금 시를 쓰고 있다는데! ―월간『현대문학』(2020년 10월호) 이 시를 읽고 있으니 꼭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알아줄 만한 시를 쓰는 것도 아니라서 그냥 내 좋아서 딱히 다른 일을 할 것도 여력도 없어서 취미라는 말을 붙여 시라는 것을 읽고 보고 있지만 어떤 때는 아니 시보다 나는 산을 오르고 산의 풍경이나 감상하며 꽃 사진이나 찍으면서 유유자적 걷는 것이 더 좋을..

아버지와 국밥 /이철

아버지와 국밥 ​ 이철 ​ ​ ​ 아버지는 국밥을 좋아했다 장날 아침 툴툴대는 대동 경운기 뜨신 물 한 바가지 부어주면 십 리 밖 장거리로 휑하니 나서는 아버지는 국밥을 좋아했다 딸보 덕구네 어물전 지나 저기 저만치 국밥보다 더 따뜻한 국밥집 아줌마를 좋아했다 모닥불에 몸을 녹이듯 국밥 그릇에 손을 대고 있으면 아버지는 어느새 국밥보다 더 따뜻한 사람이 되어 내 귀를 만져주었다 이제 나도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한 그릇 국밥이 그리운데 국밥보다 더 따뜻한 국밥집 아줌마가 그리운데 세상은 갈수록 찬밥인지라 뜨신 국물 한 그릇 부어주면 어느새 뜨건 국밥이 되는 갈수록 세상은 겨울인지라 아버지는 국밥을 좋아했다 국밥보다 국밥 가득 피어나는 사람들의 입김을 좋아했고 국밥보다 더 따뜻한 사람들의 손을 좋아했다 ―시..

어느 슬픔이 제비꽃을 낳았나 /곽도경

어느 슬픔이 제비꽃을 낳았나 곽도경 누가 눈물 떨구어 흙 속에 묻었나 누가 그 슬픔 빠져나오지 못하게 시멘트를 덮었나 단단한 바닥 틈서리 밀어내며 올라온 눈물 그렁그렁한 그 아이 ㅡ시화집『오월의 바람』(두엄, 2020) 세상에 진달래꽃 밖에 없는 줄 알다가 등산을 시작하고부터 제일 먼저 관심을 가진 꽃이 제비꽃이었습니다. 제비꽃도 보라색만 있는 줄 알았는데 북한산을 등산하다가 노랑꽃이 모다기모다기 노랑나비처럼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반해서 사진을 찍기 사작했습니다. 노랑제비꽃이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그저 노랑제비꽃도 있구나 싶었는데 흰꽃이 핀 제비꽃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제비꽃이 무려 60여종이 넘고 지금도 계속해서 잡종이 생겨나고 있을 거라고 합니다. 보라색 외 처음 본 노랑제비꽃을 비롯하여..

누나가 주고 간 시 /이철

누나가 주고 간 시 이 철 112-2119-1212-09 부산은행 이진희 철아 누야다 3만원만 부치도라 미안타 택배 일 하다 늦게 본 문자 시집 내려면 출판사에 300만 원 함진아비 함지고 가듯 발문에 50만 원 못난 시 시집 보내려고 집사람 몰래 3년간 모아온 돈 250만원 해병대 출신 자형 만나 아들 둘 낳고 반여2동 새벽별 아래 찬송가를 부르며 하루에 한 바퀴 여리고성을 도는 누나 그 누야한테 멀쩡한 돈 5만 원을 보냈다 시가 좀 모여도 돈 없으면 시한테 미안하고 점심값 아껴가며 돈을 좀 모아놓고도 시가 안 써지는 장마철 누나가 시 한 편 주고 갔다 단돈 5만 원에 ―시집『단풍 콩잎 가족』(푸른사상, 2020) --------------------- 시를 쓰는 사람에게 시집은 좋은 선물이다. 그래서..

초승달 /안규례

초승달 안규례 누가 몰래 파 먹었을까 움푹 패인 저 가슴을 바람이 깎았을까 구름이 퍼 갔을까 드넓은 하늘 모서리 홀로 서성이는 계신 어머니 ㅡ시집 『눈물, 혹은 노래 』(청어, 2021) -------------------------------------------------- 어머니 시는 참 많다. 아버지 시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은 어머니는 생명의 모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어머니는 시의 영원한 주제라고. 그래서 시인들이 시를 배우면 어머니 시부터 쓴다는 말이 있다. 시인이라면 한두 편 아니 몇 편씩 가지고 있는 시인도 있을 것이다. 김초혜 시인은 아예 어머니를 통째로 하여 시집을 내지 않았던가. 시인들이 어머니를 여러 사물에 비유하고 객관적 상관물로 끌어들이는데 달을 어머니로 보고 쓴..

금강초롱꽃 연가 /임종삼

금강초롱꽃 연가 임종삼 에밀레 에밀레라 바람결에 듣던 소리 서라벌 첫새벽을 일깨우던 범종소리 이 높은 산정에 날아와 꽃으로 피어나네 함사요 함사세요 동구밖 외침소리 백마 탄 꼬마 신랑 꽃가마 탄 이쁜 각시 청홍등 금강 꽃등을 앞세우고 오시네 가련다 또 오련다 만남의 금강산하 자줏빛 꽃 한송이 찬비에 떨고 있다 철책선 어서 걷자며 청사초롱 드는 꽃 ―계간 『詩하늘』(2020년 가을호) 언젠가 강원도 어느 산을 산행하다가 은방울꽃을 본 적이 있었다. 큰 이파리 아래 작은 꽃들이 종종종 종을 울리고 있었다. 홀딱 반해서 산을 오르다말고 한참이나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런데 금강초롱꽃은 아직 인연이 안 닿아서인지 마주치지를 못했다. 다만 사진에서 만나 보니 색깔도 이쁘고 직접 본다면 홀딱 반할 것만 같다. 화사..

서울살이 /강보철

서울살이 강보철 난 아프면 안 되고 난 다치면 안 되고 꿈을 꾸었는데 내일을 기다렸는데 아끼자고 꼭 쓸 만큼만 쓰자고 했다 참고 참자고 스스로 다짐도 했다 견디고 조금만 더 견디자고 했다 1원도 허투루 쓰지 않고 1초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잡아야지, 잡아야지 손끝에 만져지는 것 같은데 또 멀어지는 위선을 앞세운 세상 애써 죽 쒀서 개 줬다 ―계간 『詩하늘』(2020년 가을호) 감태준 시인은 ‘철새’라는 시에서 조심하라고 하면서 앞서 날아가던 아버지가 발을 헛디뎌서 자식도 같이 떨어진 자리가 서울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는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좀 더 좋은 환경을 찾아서 서울로 일부로 거처를 옮기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계획을 한 것도 아니고 어쩌다가 서울이라는 곳에 떨어져서 그 한 귀퉁..

아라 연꽃 /신순말

아라 연꽃 신순말 칠백 년 잠 속에서 씨앗이 꿈꾸었던 세상의 하늘빛은 오늘과 같았을까 기나긴 시간의 실타래 아라*에서 멈추고 어제의 꿈을 건넌 꽃송이 눈을 뜨면 단잠에서 막 깨어난 아이의 볼이 붉다 선명한 저 연꽃 같은 아이들아 아이들아 * 아라 : 아라가야 땅이었던 경남 함안. 700년 전의 연씨를 출토하여 발아에 성공, 홍련을 피워내고 그 이름을 '아라홍련'이라 함. ―계간『詩하늘』(2020년 가을호) 식물은 위대한다. 우선 그 생명력에 감탄을 하고 척박한 곳 산성 땅 어디서나 자라는 식물이 부럽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왜 안 그런가. 보라 식물의 씨앗은 보도블럭, 담벼락 구멍, 지붕 위 안 가는 곳이 없고 못 가는 곳이 없다. 낭떠러지 절벽의 끝 아슬아슬한 곳에서도 그 생명력을 키운다. 나는 가끔 그..

로또 /김봉용

로또 김봉용 우리 마눌은 나에게 로또다 맞는 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생을 걸어가는 방향은 같다 내가 앞을 보면 그녀는 뒤를 보는 늘 어긋나는 관계이지만 방향을 함께한다는 건 서로가 얼마나 기둥이 되는 일인가 ―계간 『詩하늘』(2020년 가을호) 시의 내용을 읽기도 전에 제목만 봐도 관심이 가는 로또입니다. 누구나 대박을 꿈꾸는 로또 하지만 아무나 되지 않는 로또...언뜻 생각하기엔 로또를 사서 천원이라도 되었나 아니면 만날 사도 꽝이라는 어떤 안타까운 사연이 들어있나 싶은데 엉뚱하게도 부부 이야기입니다. 캬캬캬 이렇게 웃으면 안 되는데 몇 줄을 읽는 순간 웃음이 터집니다. 맞는 게 하나도 없답니다. 남남으로 만난 부부, 길다 면 긴 한평생 살아오면서 맞는 것보다 안 맞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살아본..

코로나 2 ―고슴도치 딜레마/곽도경

코로나 2 ―고슴도치 딜레마 곽도경 당신과 나 사이 거리는 2미터가 적당하다고 하네요 손을 잡을 수도 안아줄 수도 없는 거리에서 간절함을 버무린 색은 자주빛 요즘 핫한 바이러스 같기도 하네요 마음대로 손잡고 마음 놓고 포옹했던 시간들이 하루 종일 구급차에 실려 음압병실로 이송되고 있어요 일상이 그리움이 되는 일 사실 그건 상상 속에서조차 없었던 일 온몸 가시가 서로를 찌를 수 있으니 적당한 거리는 필수 사랑에도 거리가 필요해요 곧 다가갈게요 그때까지 당신 부디 안 녕 ―시화집『오월의 바람』(도서출판 두엄, 2020) ―계간 『詩하늘』(2020년 가을호) ―시집『아침이 오면 불빛은 어디로 가는 걸까』(학이사, 2020) ------------------- 요즘 정말 코로나19땜에 죽을 맛입니다. 사람이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