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읽고 -수필 329

너와집 /박미산

너와집 박미산 갈비뼈가 하나씩 부서져 내리네요 아침마다 바삭해진 창틀을 만져보아요 지난 계절보다 쇄골 뼈가 툭 불거졌네요 어느새 처마 끝에 빈틈이 생기기 시작했나 봐요 칠만 삼천 일을 기다리고 나서야 내 몸속에 살갑게 뿌리 내렸지요, 당신은 문풍지 사이로 흘러나오던 따뜻한 온기가 사라지고 푸른 송진 냄새 가시기 전에 떠났어요, 당신은 눅눅한 시간이 마루에 쌓여있어요 웃자란 바람이, 안개가, 구름이 허물어진 담장과 내 몸을 골라 밟네요 하얀 달이 자라는 언덕에서 무작정 기다리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화티에 불씨를 다시 묻어놓고 단단하게 잠근 쇠빗장부터 열겁니다 나와 누워 자던 솔향기 가득한 한 시절, 당신 그립지 않은가요? -2008 당선작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을 그대로 표출한다고 해서 다 시가 되는 건 ..

봉화역 /김연화

봉화역 김연화 내가 태어난 마을은 역이 있는 읍내 마을이었다 역 대합실에는 작은 매점이 있었는데 그 매점은 기차가 들어올 때만 문이 열리고 전등이 켜지고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그 매점에서 저마다 종합선물세트라든지 과일이라든지 술을 사서 신작로를 나와 윗길로 아랫길로 흩어지곤 했다 기차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 불이 꺼지고 문이 잠기곤 했다 우리 집 마루에서 놀다가도 기차소리가 나면 달려가던 ㅡ시집『초록 나비』(천년의시작, 2019) ------------- 봉화역이 어디 있나? 모르는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안다. 봉화역은 영동선이다. 영동선은 경상북도 영주 내륙에서 바닷가가 있는 강원도 강릉까지... 봉화는 문단 앞 뒤 옆에 붙어 있는 역으로 그 사이 문단이라는 곳은 내 아버지의 고향이고 내 사촌들이 어린 ..

감자꽃 /이재무

감자꽃 이재무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 꽃피어 더욱 서러운 女子 자주색 고름 물어뜯으며 눈으로 웃고 마음으론 울고 있구나 향기는, 저 건너 마을 장다리꽃 만나고 온 건달 같은 바람에게 다 앗겨버리고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비탈 오지에 서서 해종일 누구를 기다리는가 세상의 모든 꽃들 생산에 저리 분주하고 눈부신 생의 환희 앓고 있는데 불임의 女子, 내 길고긴 여정의 모퉁이에서 때묻은 발목 잡고 퍼런 젊음이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 내 女子, 노을 속 찬란한 비애여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 꽃피어 더욱 서러운 女子 -시집『위대한 식사』(세계사. 2002) 감자는 밀과 벼, 옥수수와 함께 세계 4대 작물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약 7천 년 전 페루 남부에서 재배를 시작했고 남미 원주민들에게 주식이었다고 한..

얼굴 반찬 /공광규

얼굴 반찬 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 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 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 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시집『말똥 한 덩이』(실천문학사, 2008) 언제부턴가 혼밥이라는 말이 일상에서 식상한 말처럼 유통이 되고 있다. 다음 어학사전에도 올라와 ..

초록 나비 /김연화

초록 나비 김연화 꽃들 잔칫상 물린 자리 오월 끝자락 잎들의 세상은 사람만 두고 모두 초록이다 잎사귀의 꿈이 나비가 되었을까 초록 날개 저어 봄을 건너온 유월 금오산 기슭에서 본다 표본실에서도 본 적 없는 초록 나비 눈부시지 않아서 더욱 아름다운 봄꽃 떠난 세상을 온통 휘젓는 초록의 날갯짓이 평온하다 ㅡ시집『초록 나비』(천년의시작, 2019) ----------- 금오산은 어디에 있는 산이며 어떤 유래를 가지고 있을까. 서울 수도권을 둘러싸고 있는 북한산국립공원인 북한산, 도봉산, 사패산을 마주하고 있는 수락산과 불암산 그리고 관악산과 삼성산을 제 영역 순찰하듯 골목길을 맴돌고 있는 길냥이처럼 사계절 7개 산을 돌고 도는 나에겐 금오산은 낯선 산이다. 찾아보니 금오산은 977m로 북한산 최고봉 백운대 8..

아주 텅 빌 때까지, 장미 /조선의

아주 텅 빌 때까지, 장미 조선의 돌과 바람과 직립의 돌담과 햇빛 그 환한 속 향기까지 삼켜내는 마음 이 모든 것들의 안간힘이 허공에서 출렁거린다 색에서 색을 빼거나 더해서 눈물 한 솥 끓여내듯 절정의 아름다움이 처음 간망했던 기도와 같을 때 애끓는 사람의 가슴속에서도 장미꽃은 핀다 밤과 낮을 무시로 건너기 위해 가시에 찔려 생인손 앓을 때 사랑과 이별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가시에 박힌 상처의 깊이만큼이나 세상일에 숨이 턱턱 막혔다 생애 굽이친 무수한 비명처럼 발꿈치 닿는 곳마다 빈 마음을 들키고 말았다 휘어지는 가지 끝에 매달렸지만 누구보다도 먼저 당신 가슴에 닿기를 원했다 까닭모를 외로움에 한껏 발을 세우고 화르르 불이 붙는 곳 아주 텅 빌 때까지 내어지는 한 생애 눈으로 보거나 코로 맡거나 귀로 듣..

애월涯月 /정희성

애월涯月 정희성 들은 적이 있는가 달이 숨쉬는 소리 애월 밤바다에 가서 나는 보았네 들숨 날숨 넘실대며 가슴 차오르는 그리움으로 물 미는 소리 물 써는 소리 오오 그대는 머언 어느 하늘가에서 이렇게 내 마음 출렁이게 하나 ―시집『시를 찾아서』(창비시선 2009) ------------------ ‘애월’이 달에 있는 달선녀 이름인가. 애월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 애월에 대한 동경심이 더 생길 것 같은 이름이다. 애월, 애월 하면 애월에게 애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애걸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애월은 제주도에 있는 한 바닷가 마을의 이름. 도대체 이 애월의 바닷가가 어떻게 생겼기에 많은 시인들이 앞다투어 애월을 보고지고 했는가. ‘자화상‘처럼 애월을 노래한 시인을 많다. 아내와 제주..

당고개 /고창수

당고개 고창수 가을날 당고개에 오면 나는 무엇을 노래할까? 그 너머엔 모든 것이 끝나는 듯한 당고개에 오면 현실과 꿈의 경계선(境界線) 당고개에 오면 나는 경계인(境界人) 두 영토 사이에 헛갈린 당고개에 오면 그 너머는 어디 잡기도 하고 놓치기도 하는 당고개에 오면 자전거 수리점 앞 두 노인 먼 하늘을 바라보고 계란 한 꾸러미씩 안고 할머니들이 서성대는 이곳 나는 무슨 말을 할까? 무슨 시를 쓸까? (시문학, 5월호) -이은봉·김석환·맹문재·이혜원 엮음『2011 오늘의 좋은시』(2011, 푸른사상) ------------- 당고개는 어디일까?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사람마다 떠오르는 기억이 다를 것이다. 인터넷에서 당고개를 입력해보니 서울지하철 4호선 역명과 서울 용산 어디쯤 천..

진달래 /이우디

진달래꽃 이우디 열 손가락 모자라 헤아리지 못합니다 피었다 진 날들, 꽃빛 잊었는지 아니 행복한지 궁금한 그 사람을, 아직도 잊는 중입니다 ㅡ시집『수식은 잊어요』(황금알, 2020) -------------- 저는 한때 우리나라 꽃이 무궁화가 아니라 척박한 산성땅에서도 잘 자란다는 전국산천의 어디에나 피고 있는 진달래꽃이 우리나라 꽃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진달래꽃 하면 누가 생각날까요? 뭐 물어보나마나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 시작하여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로 끝나는, 만인이 다 아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이지요. 또 그다음에 진달래꽃 하면 생각나는 시는 누구일까요? 많은 시인들이 진달래꽃을 노래했고 참 많이도 쓰여 졌습니다. 직설적이든 은유든 비유든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진..

파두 /이우디

파두 이우디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고장난 후렴구가 병실 창문 넘어가면 새를 품은 허공은 종종 금이 갔다 새들의 눈물 받아먹은 구름 북쪽으로 흐르다 신호등에 걸리고 노래인지 신음인지 흐늑흐늑 창밖, 은행나무 흔들면 부러진 화살 같은 햇살 속에서 죽은 물고기가 떠오르기도 하였다 병원 뒤뜰에 납작납작 주저앉은 우울한 가락 민들레처럼 채송화처럼 봄, 여름 다 보내고도 시들 줄을 몰랐다 계단에 걸터앉은 앉은뱅이처럼 일어설 줄 모르는 마른 뼈들이 연주하는 두만강, 침묵하는 먼 강바닥으로 아버지 자꾸 미끄러지셨다 님에게, 로 가시는 환승역에서 잠시 젖은 몸 말리는 뱀처럼 마르고 마르다가 푸석푸석 입김만 날리다가 더는 남길 게 없다는 듯 거품만 게우다가, 음의 파도 저어가는 파두처럼 낡은 의자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