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읽고 -수필 329

메이팅 콜 /박숙경

메이팅 콜 박숙경 창문을 닫지 마 반짝이던 한낮의 수식어들 모두 잠들어버린 달빛의 시간이야 통속적이라고 놀려도 괜찮아 창틀에 앉아 목을 빼고 건너편 흰 고양이를 훔쳐보기도 해 너의 심장을 만져보고 싶어 너의 젖은 발바닥을 만져보고 싶어 애써 울려고 노력하지 마 애써 웃으려고도 하지 마 잃어버린 너의 목소리는 잃어버린 너의 과거야 그러니 오늘밤은 나랑 놀아줄래 망설이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고 ㅡ시집『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시인동네, 2021) ---------------- 소리로서 애원하는 사랑을 ‘메인팅 콜‘이라고 한다. 고양이들의 사랑놀이도 이 메이팅 콜로 시작을 하는데 신혼 때의 일이다. 창문 밖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새벽 2시 누가 아기를 버리고 갔나 도무지 잠을 이룰..

월곶 포구 /조병기

월곶 포구 조병기 갈매기 몇 마리 드문드문 고깃배 몇 척 갯벌에 앉아 졸고 있다 바닷물은 언제 들어올지 몇 해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었는데 수산시장 단골집 문도 잠겨 있다 골목길 두어 바퀴 돌다가 가까스로 찾은 순대국집에서 혼자 낮술을 마신다 세상살이가 좋아졌다는데 살기가 엄청 편리해졌다는데 갈수록 낯설기만 아직도 섬 뒤에 숨어버린 바다는 돌아올 줄을 모른다 고깃배 던져버리고 가버린 그 친구 지금 어디 가 사는지 ―월간『우리詩』(2021, 8월호 398호) ------------- 월곶포구가 어디일까,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우리나라 포구도 많겠지. 어딘가 찾아보니 경기도 시흥 쪽이다. 가까이 소래포구도 있고... 소래포구는 워낙 알려져 말할 것도 없지만 수도권에서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운 월곶포구 는 ..

메이팅, 콜 /박숙경

메이팅 콜 박숙경 창문을 닫지 마 반짝이던 한낮의 수식어들 모두 잠들어버린 달빛의 시간이야 통속적이라고 놀려도 괜찮아 창틀에 앉아 목을 빼고 건너편 흰 고양이를 훔쳐보기도 해 너의 심장을 만져보고 싶어 너의 젖은 발바닥을 만져보고 싶어 애써 울려고 노력하지 마 애써 웃으려고도 하지 마 잃어버린 너의 목소리는 잃어버린 너의 과거야 그러니 오늘밤은 나랑 놀아줄래 망설이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고 ㅡ시집『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시인동네, 2021) ---------------- 소리로서 애원하는 사랑을 ‘메인팅 콜‘이라고 한다. 고양이들의 사랑놀이도 이 메이팅 콜로 시작을 하는데 신혼 때의 일이다. 창문 밖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새벽 2시 누가 아기를 버리고 갔나 도무지 잠을 이룰..

칸나가 피는 오후 /이이화

칸나가 피는 오후 이이화 하늘거리는 연분홍 블라우스 여미면서 봄날이 떠나간 도로 한 귀퉁이 수다쟁이 여름 붙들어 세워 두고 여자가 도착했다 늘씬한 큰 키에 걸친 푸른 원피스 자락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차창 밖으로 휘파람 날리는 사내들 눈빛이 위태롭다 한 올 한 올 짜내려 간 노른자 같은 시간들이 너무 느슨하거나 너무 팽팽하게 당겨지는지 새빨간 립스틱만 자꾸 덧칠하고 서 있는 여자 계절은 지나온 시절을 복사하다가 붉은색 잉크를 엎질러 체감온도 급상승을 찍고 있는데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한낮 타는 목 길게 빼고 싼 티 나는 웃음 치대며 여름을 팔고 있는 그 여자 칸나 ―시집『칸나가 피는 오후』(그루, 2021) ------------------- 여름만 되면 칸나가 눈에 밟힌다. 저한테 아무 빚진 것도 ..

사랑의 묘약 /박성규

사랑의 묘약 박성규 믹스커피를 탄다 늘 해오던 일이라 근골격계에 걸리지 않게 능수능란하게 커피를 탄다 어떤 날은 맛이 있고 어떤 날은 떨떠름한 맛이 난다 같은 물이고 같은 커피인데 맛이 다른 이유는 모른다 어제도 그랬다 온도가 맞지 않아서 그랬을까 커피 맛이 입 안에서 뱅뱅 돌기에 소주 한 방울 떨어뜨렸더니 금방 커피 맛이 사르르 돌아왔다 카푸치노보다 더 부드러웠다 혼자 마시기도 아깝다 같이 마실 사람 없소? ―시집 『내일 아침 해가 뜨거나 말거나』 (2021, 문학의전당) 제법 많은 봄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지난주도 내렸고 지지난 주 일요일에도 비가 내렸다. 일요일 산벚꽃 뵈러 가려는데 또 비가 온다고 하네. 그래 하늘이 내리는 비는 내가 어찌할 수 없고 이 빗소리 들으면서 나도 커피를 한 잔 마셔야겠..

사랑의 묘약 /박성규

사랑의 묘약 박성규 믹스커피를 탄다 늘 해오던 일이라 근골격계에 걸리지 않게 능수능란하게 커피를 탄다 어떤 날은 맛이 있고 어떤 날은 떨떠름한 맛이 난다 같은 물이고 같은 커피인데 맛이 다른 이유는 모른다 어제도 그랬다 온도가 맞지 않아서 그랬을까 커피 맛이 입 안에서 뱅뱅 돌기에 소주 한 방울 떨어뜨렸더니 금방 커피 맛이 사르르 돌아왔다 카푸치노보다 더 부드러웠다 혼자 마시기도 아깝다 같이 마실 사람 없소? ―시집 『내일 아침 해가 뜨거나 말거나』 (2021, 문학의전당) 제법 많은 봄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지난주도 내렸고 지지난 주 일요일에도 비가 내렸다. 일요일 산벚꽃 뵈러 가려는데 또 비가 온다고 하네. 그래 하늘이 내리는 비는 내가 어찌할 수 없고 이 빗소리 들으면서 나도 커피를 한 잔 마셔야겠..

석류, 다시 붉다 / 김영인 - 제20회 토지문학상 대상

석류, 다시 붉다 / 김영인 - 제20회 토지문학상 대상 늙은 석류나무에 다시 몇 송이 꽃망울이 맺혔다. 정원에 죽은 듯 서 있던 몸이었다. 봄꽃들의 잔치가 끝나갈 무렵 석류나무는 태아처럼 불그스레한 이파리를 살짝 내밀었다. 오뉴월 햇살 담뿍 머금으며 파릇파릇 몸집을 불렸다. ​ 서른 끝자락에 이 집에 들어왔다. 적막한 마당에는 묵은 나뭇가지며 잡풀과 낮은 나무들이 뒤엉켜있었다. 한쪽에는 석류나무만이 하늘로 가지를 뻗친 채 푸르렀다. 뒷짐 진 터줏대감처럼 석류나무는 신혼살림 차리듯 들떠 들어오는 우리를 환하게 맞았다. ​ 뜰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석류나무 아래다. 책을 읽다가 눈이 침침해지면 그 그늘로 달려갔다. 뜨락의 꽃과 나비도 바라봤고, 담 안으로 날아든 한 마리 흰 비둘기도 지켜봤다. 구름이 ..

삼류 /이이화

삼류 이이화 칼바람 한 귀퉁이 꺾어 오랜 동반자 삼아 어깨에 메고 지난밤 잠시 말아두었던 길을 새벽 어둠 속에 펼쳐 놓는다 찢겨진 잠에서 뛰어나온 코딱지만 점포가 달려와 하루치 셋값을 선금으로 계산하느라 분주해지면 동대문 어느 여공의 거친 손을 쓰다듬다가 박음질로 달려온 시장표라는 이름의 옷이 보푸라기꽃 피워 낼 주인공을 기다린다 비쌀수록 없어서 못 판다는 백화점 명품관에서 클래식 음악이 고상하게 일류 고객을 위해 목청을 높이는 동안 시장 바닥의 질척한 삶은 더 깊은 언더그라운드 속에 갇히곤 한다 학습된 유산도 변변한 취향도 정착하지 못해 빈 가지처럼 마구 흔들리는 날 소주 한 병과 안주로 곁들인 뽕짝 가가 한 구절에 입맛이 돌아 마시고 또 마시던 하급의 노래들 찾아오는 단골손님의 얇은 지갑마다 걱정이 ..

별일 없었니껴? /이선영

별일 없었니껴? 이선영 사투리는 사투리가 아니다 그 산천이 낳은 그 땅의 소리다 탯줄 타고 들려오던 나지막한 어미 당부로 제 몸에 새긴 빗살 문신이라 어색치 않은 오가는 발걸음 무던한 촉수에 가끔씩 귀가 쏠릴 때 웃음 만발한 얼굴들이 언뜻 스치고 조여 맨 객지 허리끈 느슨하게 풀 수 없던 표준어의 교편 강 건너 이제는 풀려 가는 헐렁함에 다시 살아나는가 뼛속까지 새겨진 내 사투리는 사투리가 아니다 그리움으로 편하게 단박 안기는 걸 보면 그간 별일 없었니껴? ―계간『詩하늘/통권 100호 특집호』(2020년 겨울호) 말이라는 것은 사람 이름처럼 세상에 없는 사물이 생기면서 이름을 얻어 새로운 말들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시대의 생활상에 따라 버스표 토큰처럼 일시적으로 생성되었다가 쓰임이 다하면 소멸하..

꽃 따러 갔다가, 꽃 따라 가버렸지요 /김청수

꽃 따러 갔다가, 꽃 따라 가버렸지요 김청수 동생은 세상에서 겨우 백일을 살다가 갔지요 세 살 더 먹은 나는 살아남아 철딱서니 없이 이 골목 저 골목 쏘다녔지요 어미는 꽃 피는 봄날, 꽃 따러 갔다가 꽃 따라 가버렸지요 우리 어머니 손놀림, 그렇게도 빨랐다더니 좋은 솜씨 칭찬도 자자했다더니 흰명주 옷 입고 하느적하느적 나비 되어 날아가 버렸지요 병원 침대에 누워서 눈에 밟히는 어린 새끼들 남기고 그 새벽 어둠에 말려 가 버렸지요 ―계간『詩하늘/통권 100호 특집호』(2020년 겨울호) ’꽃 따러 갔다가, 꽃 따라 가버렸지요‘ 는 제목이 우선 눈길 마음길을 끌기도 하지만 시를 보고 있으니 한 편의 전설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전설을 시화한 시에서 보는 것처럼 조지훈 시인의 석문(石門)이나 서정주 시인의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