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220

<시조> 2022년 제12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우수상 수상자의 작품 -죽! 이는 여자 외 2 /박화남

죽! 이는 여자 박화남 가을은 익어가는데 그녀는 텅 비었다 호박죽 끓이는 일이 뜨거운 하루라고 그 자리 오래 머물며 입맛을 저어준다 눈 앞이 막막할 때 그리운 건 정이다 푹푹 빠진 맨 삶이 스스로를 달래며 씨를 뺀 둥근 말과 표정 데워서 담아낸다 바깥이 단단해도 속은 더 풀어진다 손끝의 농도는 퍼낼수록 짙어져 더 달게 살아내려고 한 계절을 허문다 ―시선집『제12회 천강문학상 수상작품집』(경남, 2022) 2022년 5월 28일 오후 7시 51분 멍들다 박화남 평생을 납땜으로 대낮을 때우셨던 아버지의 온몸이 밤마다 흘러내린다 불똥이 나를 뚫고서 타는 줄도 모르고 바지마다 검은 자국 불빛의 뒷면이다 멍들은 그 시간들 얼마나 태웠는지 파편을 받아낸 자리 별빛으로 박혔을까 아버지의 별들은 황금빛 구멍이다 안쪽을..

<시조>2022 제12회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대상 수작자의 작품 -피 혹은 꽃 피는 속도 외 2 /김수형

피 혹은 꽃 피는 속도 김수형 1. 레미콘이 뒤뚱거리며 언덕길을 오른다 만삭의 배를 돌리며 조금만, 조금만 더! 두 손을 움켜쥘 때마다 떨어지는 링거의 수액 피와 살이 섞이고 심장마저 꿈툴대는 안과 밖을 둘러싼 호흡들이 숨 가쁘다 뜨겁게 쏟아지는 양수 꼴나무에도 피가 돈다 2. 직진하려다 본능적으로 핸들을 우로 돌렸지 운전석 백미러를 툭 치며 달리던 트럭 수천의 새 떼 날아와 등골에서 깃을 털던 3. 백미터를 3초에 달려 톰슨가젤 목을 물고 거친 술 몰아쉬는 치타의 퀭한 눈동자 죽음과 마주하는 건 늘 한 호흡의 속력이다 ―시선집『제12회 천강문학상 수상작품집』(경남, 2022) 2022년 5월 28일 오후 6시 15분 조치원鳥致院 김수형 새 꿈을 꾸고 나면 깃털들이 흩어진다 피가 잘 안 통하는 구름은 하..

2022년 천강문학상 시부문 대상 수상자의 작품 -등받이의 발명 외 2 /배종영

등받이의 발명 배종영 의자는 누구든 앉히지만 스스로 앉아본 적은 없다 의자가 특히 이타利他적 사물인 것은 등받이의 발명 때문이다 사람의 앞이 체면의 영역이라면 등은 사물의 영역이지 싶다 기댄다는 것, 등받이는 혈족이나 친분의 한 표상이지도 싶다. 갈수록 등이 무거운 사람들 등받이에 등을 부려놓고 비스듬히 안락을 느끼는 것이다 언젠가 본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은 취한 남자가 끝까지 넘어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몸에 등받이 달린 의자 하나 들어 있지 싶었다. 취약한 곳에는 대체로 이타적인 것들이 함께 있다 혈혈단신한테도 온갖 사물이 붙어 있어 결코 혼자인 것은 아니지 싶다. 등받이는 등 돌리는 법이 없듯이 나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등에서 절대적인 등을, 등받이를 배운 사람이다. 계산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지..

<시조>고비, 사막 /손영희<2021 제40 중아시조대상>

고비, 사막 손영희 아버지, 간밤에 말이 죽었어요 그때 고삐를 놓은 건지 놓친 건지 쏟아진 햇살이 무거워 눈을 감았을 뿐 한 발 올라가면 두 발 미끄러지는 잿빛 모래언덕도 시간을 허물지 못해 이곳은 지평선이 가둔 미로의 감옥입니다 한세월 신기루만 쫓다가 허물어지는 사방이 길이며 사방이 절벽입니다 아버지, 간밤에 홀연히 제 말이 죽었어요 ㅡ《중앙일보》 (2021. 12. 8) 2021년 12월 16일 20시 53분

<시조>그 겨울의 뿔 /김양희<2021 제40 중아시조신인상>

그 겨울의 뿔 김양희 1 새까만 염소에 대한 새까만 고집이었다 힘깨나 자랑하던 불에 대한 나의 예의 어머니 구슬림에도 끝내 먹지 않았다 염소의 부재는 식구들의 피와 살 살 익은 비린내에 잎 코를 틀어막았다 엊그제 뿔의 감촉이 손바닥에 남아서 2 그 겨울 식구들은 감기에 눕지 않았다 고집을 부리던 나도 눈밭을 쏘다녔다 염소의 빈줄만 누워 굵은 눈발에 채였다 ㅡ《중앙일보》 (2021. 12. 8) 2021년 12월 16일 20시 47분

<시조>불편에게로路 /권선애<2021 제40 중아시조신춘시조상>

불편에게로路 권선애 편안한 大路 벗어나 불편에게로 갑니다 자동화된 도시에서 손발이 퇴화될 때 발밑은 물관을 따라 실뿌리를 뻗습니다 지칠 대로 지쳐가 풀 죽은 빌딩 숲은 낯선 대로 익숙한 대로 껍질만 남긴 채 별들의 보폭을 따라 좁은 길을 걷습니다 좋을 대로 움트는 불편을 모십니다 어두우면 꿈 꾸는 대로 밝으면 웃는 대로 낯과 밤 시간을 일궈 내 모습을 찾습니다 ㅡ《중앙일보》 (2021. 12. 8) 2021년 12월 16일 20시 35분

<시조>왕궁리에서 쓰는 편지 /정진희

왕궁리에서 쓰는 편지 정진희 내 맘속 풀지 못한 그리움 하나 있다 잊히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가 풍탁에 바람을 걸어 그림자로 늙어간들 차오르는 달빛조차 감당할 수 없을 즈음 잘 생긴 탑 하나 조용히 옷을 벗는다 손길이 닿기나 했을까 차마 못 지운 떨림 하나 아, 미륵의 땅 여자 되어 한 천 년은 살아봐야 옥개석 휘어지는 그 아픔을 가늠할지 늦가을 왕궁리에서 쓴다 그대 그대, 그립다. ―『한국동서문학』(2019, 겨울호) 2021년 11월 26일 21시 00분

<시조>논거울 /임성구(2021 제41 가람시조문학상 수상작)

논거울 임성구 써래질 해놓은 논이 산 그림자 비추고요 밤이면 환한 달빛 야금야금 먹습니다 가끔은 하나님의 눈물도 다 받아먹곤 하지요 오늘은 당신 보며 나를 양껏 비춰보네요 지나간 시절들이 일제히 떠오르더니 바람이 지날 때마다 한들한들 꽃 피네요 어둠에도 진한 향기 있다는 걸 몰랐어요 오래도록 맴도는 이 따뜻한 향기에 그만, 눈물이 가당찮게 도네요 논거울 속, 별이 반짝! ―『한국동서문학』(2019, 겨울호) 2021년 11월 26일 20시 11분

<시조>눈물 /정용국(2021 제6회 노산시조문학상 수상작)

눈물 정용국 동지 볕이 묻어나는 박오가리 속살에는 세상 근심 댓말 가웃 오종종 모여 산다 그 누가 돌보지 않아도 의젓하고 착하게 서둘러 지고마는 겨울해가 아쉬워도 발길이 끊어져 마음이 허둥대도 비대면 불신의 시간도 다독여서 가야지 세모의 간절함이 상처로 뒹굴지만 그래도 너를 믿는 그래서 너를 참는 간절한 둥불 하나씩 가슴속에 품고 산다 2021년 11월 26일 오전 9시 6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