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220

<시>쥐똥나무 /마경덕

쥐똥나무 마경덕 늘 고만고만한 쥐똥나무 허리쯤 닿는 제 키를 원래 그렇다고 믿는 눈치다 해마다 전지가위에 길들여지더니 공원 울타리 노릇이나 하면서 이대로 늙어갈 모양이다 꽃 같지도 않다고, 누군가 무심코 던진 말에 주눅이 든 쥐똥나무는 소심형 지난겨울 쥐똥처럼 생긴 열매를 들고 서서 이걸 어디에 숨기나 쩔쩔매는 것을 보았다 쥐똥냄새 나는 이름이 싫다고 말도 못하는 쥐똥나무 이렇게 고운 향기를 가지고 있다고 한 번도 각주를 달지 않는 쥐똥나무 겉모습에 착한 세상 향기는 보지 않고 쥐똥만 보는 시대, 쥐똥나무야 미안하다 공원에 나갔다가 반성문 한 장 쓰고 돌아왔다 ㅡ시집『글러브 중독자』(애지, 2012) 2021년 1월 7일 13시 33분

<시> 나비표본 상자 /마경덕

나비표본 상자 마경덕 화려한 옷들이 진열장에 걸려 있다. 나비는 바느질의 달인. 생전에 가봉을 하던 버릇대로 가슴에 시침핀을 꽃 고 있다. 덧댄 자국 없는 천의무봉의 솜씨들. 그 동안 주름 잡은 허공은 몇 필인지? 꽃밭은 원단 도매상, 치수에 밝은 나비는 둘둘 말린 대 롱줄자를 꺼내 길이를 잰다. 갖가지 원단은 꽃에서 나온 다. 호랑나비 가문은 얼룩무늬, 배추밭이 친정인 노랑나 비는 배추고갱이처럼 노랗다. 대대로 한 무늬만 고집한 계보에 유행은 없다. 옷 한 벌을 짓기 우해 평생을 바친 장인들, 날개옷 한 벌 을 완성하고 유리무덤에 갇혔다. 입으면 벗을 수 없는, 아 름다운 그 옷이 화근이다. 나비는 죽어도 날개를 접지 않는다. ㅡ시집『글러브 중독자』(애지, 2012) 2021년 1월 7일 13시 17분

<시조>숫돌을 읽다 /허정진(2021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숫돌을 읽다 허정진 고향 집 우물가에 등 굽은 검은 숫돌 지문이 없어지듯 닳고 닳은 오목 가슴 그리움 피고 지는 듯 마른버짐 돋는다 대장간 불내 나는 조선낫 집어 들고 제 몸을 깎여가며 시퍼런 날 세우면 뽀얗게 쌀뜨물일 듯 삭여가는 등뼈들 새벽녘 고요 깨고 쓱싹대는 숫돌 소리 가만한 한숨처럼 은결든 울음처럼 짐 진 삶 견디어 내는 낮고 느린 수리성 묵직한 중량감 든든한 무게 중심 자식들 앞날 위해 새우잠 참아내며 평생을 여백으로 산 아버지를 읽는다 [2021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2012년 1월 7일 12시 19분

<시조>적화(摘花) /이명숙

적화(摘花) 이명숙 발끝 숙인 쪽으로 올이 풀리는 저녁, 눈에 밟힌 누군가 밖에 비가 온다고 우산을 가져오다니 황홀해서 울어요 단맛이 지나가고 눈이 끈적거려도 당황하지 말아요 우연처럼 그 사랑 황홀한 기적이라니 실핏줄 죄터져도 꽃은 꽃이라서요 그대, 그대라서요 한 모금 와인으로 불안을 달래면서 한 방울 링거로크액 마음 대신 흘리면서 ㅡ『제주문학』 (2020, 겨울호) 2021년 1월 7일 12시 5분 나는 누구에게 솎여 나간 꽃이었을까

<시>바람의 유전자를 보았다 /마경덕

바람의 유전자를 보았다 마경덕 산 밑을 지나가는데 일제히 나무들이 날고 있었다. 새들에게 날개만 달아주 던 나무들이 재재거리며 새떼처럼 울었다. 누가 움켜쥐었다가 놓쳤는지, 이파리들 죄 구겨져 잠시 치솟더니 고꾸라졌다. 위험한 비행이었다. 먼발치에서 올려다본 산의 어깨가 수척했다. 바람이 쓸어내린 허공도 우묵했다. 마음을 버린 가을의 손바닥이 버석버석 마르고 있었다. 데구루루 화장실 바닥을 구르는 두루마리, 둥굴게 말려 벽에 걸렸던 숲의 기억이 쏟아졌다. 발목과 바꾼 날개를 달고 화장지는 멀리 달아난다. 나무는 뿌리를 버리는 순 간, 어디든 갈 수 있다. 대패와 톱으로 나무를 다듬던 아버지, 바람부는 날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다. ㅡ『문예감성』(2011. 봄.여름) ㅡ시집『글러브 중독자』(애지, 2012) ..

<시> 바람의 性別 / 마경덕

바람의 性別 마경덕 썰물처럼 빠져나간 바람이 너울너울 밀고 간 모래물결, 맨발로 사막을 건너간 암컷의 흔적이다. 치맛자락 끌고 조신하게 걸어갔다. 수천 년 모래알을 새며 사막을 걸을 수 있는 자는 몸을 찢은 어미만이 가능한 일, 피 냄새를 기억하는 바람은 어디론가 흘러간 제 새끼를 보려고 족적 足跡을 기록해 두었다. 하지만, 기록이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낙타의 행렬 이 그녀의 발자국에 겹쳐지고 바람이 묻힌 자리에 또 바 람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니, 이곳에서 이별이란 그저 사소한 일. 평생을 떠돌다가 우연히 마주쳐도 늙어버린 어미를 기억할 바람은 없다. 새끼를 낳은 것들의 형벌은 떠난 자식을 끝까지 기억하는 것이다. 뼈를 묻으며 살아가는 것은 사막의 오랜 관습. 별들의 장지葬地가 된 이곳에서 떠돌이 ..

<시>뒤끝 /마경덕

뒤끝 마경덕 버스 뒷좌석에 앉았더니 내내 덜컹거렸다 버스는 뒷자 리에 속마음을 숨겨 두었다 그가 속내를 꺼냈을 때도 나는 덜컹거렸다 뒤와 끝은 같은 말이었다 천변(川邊)이 휘청거렸다 나무의 변심(變心)을 보고 있었다 이별을 작심한 그날부터 꽃은 늙어 북쪽 하늘이 덜컹거렸다 코푼 휴지를 내던지듯 목력은 꽃을 내던지고 남쪽을 향해 돌아앉았다 발밑에 널린 파지를 밟으면 걸었다 자줏빛 눈물이 신발에 묻어왔다 길가 벚나무가 검은 벚찌를 버릴 때도 보도블럭은 잉크빛이었다 뒤가 어두울수록 앞은 환하고 눈이 부셨다 뒤끝이 지저분한 계절이었다 ⸺시집『글러브 중독자』(애지, 2012) 2021년 1월 7일 13시 55분

<시조>물결을 읽다 /김재호(뉴스N제주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물결을 읽다 김재호 어시장 뒷골목의 기억은 파랑이다 바다가 심장을 통째로 내어놓은 듯 난파선 퍼질러 앉은 저 장엄한 죽음이여 장황한 설명이나 단출한 부연 없이 물결처럼 그어지는 운명을 받아 든다 파도가 가르쳐주던 거스름의 무늬를 꿈과 이상은 미완의 섬, 현저한 온도 차 제 삶에 일어나는 파문을 다독이며 조각난 물빛 삼키듯 처분만 기다리네 언젠가 푸르던 그 바다로 돌아가면 배 밑에서 춤추며 퍼덕이는 날개 접고 통통배 갯배 머리에 장승처럼 서리라 ― 2021년 1월 5일 14시 20분

<시조>너라는 비밀번호 /정명숙(202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너라는 비밀번호 정명숙 너를 열 때 언제나 처음부터 진땀이 나 쳇바퀴 다람쥐처럼 단서를 되집는다 비밀은 물음표 앞에 굳게 닫혀 덧댄 빗장 하루에도 여러번씩 바뀌는 네 취향은 여기저기 흩어놓은 서투름과 내통해도 자물쇠 가슴에 숨어 드러나지 않는다 네 날씨 풀어내려 구름 표정 살펴보다 숨겨둔 꽃대라도 찾아낼 수 있을까 불현듯 네가 열린다 꽃숨어리 활짝 핀다 ― 2021년 1월 5일 오전 11시 20분

<시조>변현상 ―뭐든지 다 합니다 /건망증을 또 까먹다/치매 벽동 ―목욕을 시켜드리며(2019년 천강문학상 당선작)

뭐든지 다 합니다 /변현상 1. 정년퇴직 박갑수 씨 단독주택 대문에도 비 젖은 고지서가 연체로 꽂히면서 파도가 들이닥쳤다 침몰하는 어선 한 척 2. 콧물감기 훌쩍이는 어둑새벽 입동 무렵 골목 어귀 녹슨 트럭 어깨 높은 인력 시장 대처분 부도난 제품 벽보가 또 붙었다 3, 전무이사 상무이사 다 지나간 명함일 뿐 구명조끼 입을 채로 구명탄은 쏘아야지 일용직 가능합니다 뭐든지 시켜주세요 -------------------------- 건망증을 또 까먹다 파일이 또 삭제됐다 로그인하다 끊긴 폴더 달빛 지운 까만 밤이 전두엽에 스며들면 대뇌의 모든 전원이 통째로 정전된다 입김 어린 차창 위에 손가락으로 쓴 계약서 한눈팔다 엔터키 친 바이러스 먹은 PC 감염된 파일이 된 양 살아날 줄 모르네 공짜 같아 막 눌렀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