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220

<시>검정백합 /조정인

검정백합 조정인 모래가 우는 소리에 잠이 깼다. 지평선을 더듬어 스핑크스가 오고 있다. 그것은 이제 막 잠에서 눈 뜬 백합의 얼굴. 당신의 검정개 릴리는 밤새 발목의 피를 핥았다한다. 지혈이 안 된다한다. 나의 베갯잇에 마른 눈물이 버석거리지만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모래공동체 모래들은 서로에게 기대 마른 울음을 운다. 벌판 끝 여윈 집, 새벽 창문이 흘리는 불빛으로 당신이 있다. 눈보라 자욱한 벌판을 품은 당신, 흰죽이 눋지 않게 젓는 캄캄한 냄비바닥은 유빙처럼 흘러 어디로 가나. 당신은 생활이라는 무섭고 슬픈, 침묵하는 책을 베고 잠시 눈을 붙인다. 검은 장정의 두꺼운 책이 품은 어슴프레한 회랑을 지난간다. 백합이 좀 더 벌어졌다. 스핑크스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와 있다. 스핑크스여,이제 네가 대답할..

<시>첫사랑 /최미영

첫사랑 최미영 이슬이 데려온 아침이 느리게 안개를 먹는다 밤새 졸참나무는 치장을 더 화려하게 하고 밑둥에 쏟아낸 도토리에 횡재한 다람쥐 두근두근 내 심장은 노란 국화꽃이다 내일 또 쏟아져 내릴 빛이건만 오늘은 폭설이다 그 옛날 함께 있어도 더 함께 있고 싶던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파란 물감을 풀은 호수다 작년까지의 눈가 잔주름은 눈치 없이 양반다리를 틀고 앉았고 오늘따라 근엄하게 폼 잡은 팔자주름이 밉상이다 반 백년을 담은 얼굴, 분으로 주름을 덮지 못해도 손만 잡고 보냈던 그 날밤 추억으로 양 볼이 자줏빛 국화꽃이다 저만치 그가 온다 볼 빨간 낙엽을 들고...... ― 2021년 1월 18일 16시 55분 월요일

<시>해토解土 /김효정(제16회 사계 김장생 신인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해토解土 김효정 겨우내 굳어있던 체위가 근질거리는 걸까 오늘따라 저수지 옆, 볕바라기 하던 둔덕이 소란스럽다 봄 햇살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실금 하나 그었나 보다 아직 얼음을 품고 짱짱하던 흙이 힘없이 부스러진다 징검다리 건너듯 띄엄띄엄 긴장이 풀리더니, 대책 없는 떨림이 곳곳에서 감지 된다 마지막 자존심인양, 꽃샘바람이 한나절을 흘기다 간다 양지바른 둔덕이 꼼지락꼼지락 애기 쑥을 밀어올린다 단전에 힘을 주는 태도에서 봄을 먼저 챙기려는 치열함이 엿보인다 바람도 한몫 거드는 사이, 은빛 솜털 보송보송한 버들강아지도 욕심껏 챙긴 봄빛을 담고 터질 듯 탱탱하다 한바탕 소란에 체감온도가 높아진 것을 직감한 걸까, 날선 바람은 어느새 지워버리고 살랑대는 바람을 불러 모은다 땅에 납작 엎드렸던 냉이들도, 제멋대로 ..

<시>나비가 쓰고 남은 나비 /심언주

나비가 쓰고 남은 나비 심언주 나비를 밀어내며 나비가 날아간다 나비는 잘 접힌다 또 금방 펴진다 나비가 될까 나비가 될 수 있을까 나비를 밀어내며 나비를 깜박인다 나비는 몸이 가볍다 생각이 가볍다 마음대로 날가는 적이 드물다 줄인형처럼 공중에 매달려 나비에게서 날아간다 나비에게로 돌아간다 나비를 밀어내며 나비를 닮아간다 옥타브를 벗어나는 나비따라 부르기 어려운 나비 나비를 밀어내며 나비를 넘어선다 높아지는 나비 어머나 비가 온다 어머나 비가 간다 나비를 버리고 간 나비 나비가 채우는 나비 줄인형처럼 꽃밭 속에 나비를 담근다 나비가 될까 나비가 될 수 있을까 나비를 밀어내며 나비가 발생한다 나비를 서성이며 나비가 날아간다 ―계간 『시로여는세상』 (2015년 겨울호) 2021년 10월 16일 18시 22분 ..

<시>버블 스토리 /최영랑

버블 스토리 최영랑 그의 웃음은 나만 아는 바깥입니다 그 웃음은 가볍고 부드러운 거품이어서 누구에게나 쉬이 얹힙니다 거품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새롭게 형성되는 그룹들 관계의 밀도가 조밀해집니다 나는 거품의 추종자가 됩니다 그럴 때 내게서도 거품 하나가 피어납니다 거품은 서로에게 섞여 마모될 필요가 없습니다 가까워지는 이마와 이마, 같은 연대기를 만듭니다 이건 목적에 깃든 밀착의 힘 허구와 허구가 만나면 꿈틀거리는 루머들 이야기는 부풀길 좋아해서 터지지 직전까지 자라는 말풍선들 끝없이 이야기의 곁가지가 늘어납니다 복선처럼 바깥에 무지개가 피어나 나는 그만 아찔해집니다 활짝 핀 오후 소문은 절정입니다 터질 생각이 없습니다 거품이 거품으로 목욕을 합니다. 친절한 거품, 그와 나의 은밀한 ..

<시>옹이의 독백 /최영랑

옹이의 독백 최영랑 흔적은 기억을 벗어난 무늬 퇴화한 발자국과 숨소리가 나이테로 휘감긴다 무늬는 왜 당신을 확장시키고 있을까 물음은 미궁 속 독백으로 묻힌다 단단한 것들은 회오리 눈을 가진다 눈을 어둡거나 선명하다 소용돌이가 깊어지면 층층이 몸을 포개어 긍정과 부정의 모순을 쌓는다 아무도 모르게 안쪽으로 고인다 매듭이 말을 걸어온다 당신은 매듭으로 의자와 책상을 만든다 줄이 튀겨질 때마다 작은 세포들과 새들의 울음이 깨어난다 향이 끝없이 들락거린다 펼쳐지는 형상, 모서리와 이름들 또 하나의 그루터기를 가진 당신이 나를 본다 굽은 등으로 굽은 내력을 요약한다 이별 앞에서 내게만 보이는 옹이, 침묵을 품고 있다 문득, 밑동에서 솟구치는 가지들처럼 당신의 독백은 상처가 만든 그리움이자 집중, 쌓이다가 불쑥 내..

<시>순한 골목 /박한(24회 지용신인문학상 당선작)

순한 골목 박한 골목은 왜 이리 얌전한지 자꾸만 쓰다듬고 싶어요 숨을 쉬는데 신호를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손가락 마디를 보면 내가 헤맸던 길목을 알 수 있죠 매일 걸어다녀도 달이 지는 법은 배울 수가 없어요 사실 골목은 지붕들이 기르는 것이라서 부르는 이름들이 달라요 고장 난 컴퓨터였다가 산지 직송 고등어였다가 김숙자 씨였다가 지현이 엄마였다가 가끔은 현석아 놀자가 돼요 왜 골목이 밤이면 군데군데 멍이 드는지 술 취해 돌아오는 일용직 김기석씨를 보면 알죠 그래도 골목은 도망치지 않습니다 쫓기는 사람들이 모두 골목으로 숨어드는지는 좁아야만 이해하는 습성 나도 쫓아오는 생활을 따돌리고 골목에서 뒷발로만 서 봅니다 창밖에선 내가 걸어가고 있고요 멀리 돌아갈 수 없는 직선이 없는 지도는 여기에서 발명되었습니다 ..

<시>호른 부는 아침 /강성원(23회 지용신인문학상 당선작)

호른 부는 아침 강성원 붉은 바닷가의 집 녹색 커튼을 살며시 열어보는 아침 해 내려다보는 백사장엔 모시조개가 제 살을 비우고 날아오를 듯 흰나비로 앉아 있다 먼 길 가려는 바람은 물너울을 타고 온다 모래톱 위를 종종종 걷는 물새 떼 안개는 빨판을 달고 배 한 척 붙들어 놓지를 않는다 길을 내려가 보면 바다가 보여주는 손바닥 잠든 바위를 깨우다 시퍼렇게 멍이 다 들었다 파도는 모래사장에 음표를 새겨두고 도레시 라솔미 오르내린다 바다가 들려주는 고요하고 부드러운 음악 사랑이란 단어를 적어 넣으면 오선지 위에서 저토록 따뜻하게 꽃으로 피는 말이 있을까 바다를 향해 걸어가다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발걸음을 멈춘 해안선 메꽃이 피어 호른을 부른다 맨 처음 입술을 열 때 첫사랑이 저랬을 것이다 한 입 수줍은 입술이..

<시>알츠하이머 /김혜강(25회 지용신인문학상 당선작)

알츠하이머 김혜강 어머니가 사는 마을에는 사철 눈이 내린다 온 세상이 하얀 마을에는 기억으로 가던 길들도 눈으로 덮이어 옛날마저 하얀색이다 눈이 소복 쌓이는 마음에서 온 몸으로 그림을 그리시는 어머니 어느 유파에서 속하지 않는 그림을 지우고 지우고 그리신다 어머니가 사는 마을에는 하염없이 눈이 내려 바구니에 담을 추억도 색연필 같은 미래도 없어 하얗게 어머니는 수시로 태어난다 2021년 1월 15일 20시 40분 금요일

<시>김대호 - 허공 버스 / 먼 날 / 내가 사는 신암 혹은 신앙(제10회 천강문학상 대상 )

1 허공 버스 김대호 허공은 만원 버스다 발 디딜 틈은 고사하고 숨 쉬기도 힘들다 곗돈 떼인 여자가 친정 언니에게 무선전화를 한다 말을 내 보내는 동안에도 여자의 몸은 점점 뚱뚱해진다 머리에 파일로 저장된 분노는 압축이 풀리면서 온몸으로 번진다 여자의 입에서는 속기로도 받아적을 수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일부만 언니의 귀에 담기도 나머지는 허공을 탄다 다음 정거장에서 무단 질주하는 카 오디오의 고음이 승차한다 심지어 소리가 되지 못한, 그러나 충혈된 눈빚으로 읽을 수 있는 억울하고 치욕스럽고 한 맺힌 생각들 승차한다 잠자는 사람 헛소리까지 보태진다 이제 허공버스는 멸균 안 된 말과 생각의 승객으로 인해 고약한 냄새까지 난다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바퀴가 펑크가 날 지경이다 중력도 없이 비어 있다고 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