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220

<시>최재영 -산벚나무를 읽는 저녁/갈매기식당/버드나무 여인숙/코스모스*/주머니(2020 제19회 김포문학상 시부문 대상 당선작)

산벚나무를 읽는 저녁 최재영 물에 젖기 위해 100년을 걸어가는 나무가 있지요 퉁퉁 부르튼 맨발 사이로 세상의 저녁은 소리없이 스며들고 다가오는 천년을 가만 응시하느라 나는 바짝 가물어 있었지요 간절함은 어디에도 기록할 수 없어 한 획씩 혈관을 파고 들어갈 때마다 산벚의 흰 그늘까지 움찔거렸겠지요 한걸음 걸을 때마다 제 근원의 몸부림으로 뜨거웠을 시간들 그때의 다급한 호흡은 어떤 이의 애닮은 기록이었을까요 산벚이 거느린 골짜기들이 일제히 먹빛의 힘으로 일어서는 저녁 경판에 서려있는 푸른 맥박소리 온 산 가득 울려 퍼지는데 먹물보다 진한 핏빛눈물 하얗게 쏟아지네요 오래 전 생의 바깥에 등불을 밝힌 이들은 지금도 구국의 화엄을 새기고 있을까요 봄이면 경판 속의 활자들 환하게 피고지고 짜디짠 소금기 허옇게 일..

<시>금빛 은행나무 /이해리

금빛 은행나무 이해리 가을에 금빛으로 물든 은행나무는 환하게 밝습니다 푸른 시절엔 볼 수 없던 밝기를 가집니다 가을 은행나무 숲길을 걸어가면 다소 어두웠던 나도 환해집니다 밝아도 눈부시지 않고 환해도 쏘아보지 않는 그 은은한 밝기가 나는 너무 좋습니다 나의 생애도 가을이 와서 내 살아온 만큼의 명도가 몸 바깥으로 드러나야 한다면 꼭 그만큼의 밝기가 나의 전신에 켜졌으면 합니다 말을 할 때마다 한 잎 한 잎 아름다움 떨어져 발밑에 깔리고 서 있기만 해도 사위를 밝히는 은은함이 금빛 낭만이 되어 누구라도 걷고 싶은 길을 만드는 그런 나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계간『詩하늘/통권 100호 특집』(2020년 겨울호) 2021 1월 21일 15시 4분 /목요일

<시>탑 /이해리

탑 이해리 이끼도 끼고 군데군데 금 갔다 꼭대기 층 한 귀퉁이는 떨어져 나갔다 떨어져 나간 곳을 푸른 하늘이 채우고 있다 도굴과 훼손과 유기의 질곡을 온몸으로 받들고도 꼿꼿이 서 있는 것은 견디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견딤으로 공을 들인 몸은 좀 깨지기도 해야 아름다웠다 고난의 상흔도 보여야 미더웠다 언제부턴가 온전한 것이 외려 미완이란 생각이 든다 깨진 곳을 문질러 가슴에 갖다 대면 온몸에서 수군거리는 상처들 이루어지는 것 드물어도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 가슴 층층에 쌓여 바람 부는 폐사지에 낡아가고 있다면 당신도 나도 다 탑이다 ⸺계간『詩하늘/통권 100호 특집』(2020년 겨울호)

<시조>만조의 시간 /길덕호(2020 제8회 등대문학상 시부문 우수작 당선작)

만조의 시간 길덕호 달도 부풀어 올랐다 꽃대는 부러지지 않았다. 꽃들이 개화하는 시기 등대 밑에는 캐다 만 조개며 바지락이 피다 만 꽃잎처럼 입술을 오물거린다. 물때가 들어오면 어머니는 바람 빠진 갯벌을 벗으신다. 달은 아직 채 뜨지 않았고 꽃잎은 그대로 숨죽이며 있었다. 펄 밑에 숨었던 꽃잎들 결박당한 몸을 스스로 푸는 시간 바닷물이 마른 몸을 양수로 가득 채우는 생명들 꽃 피는 순간 등대도 자신의 몸을 부풀려 먼 바다 위에 별빛으로 띄운다. 바다는 모든 준비를 끝내고 윤슬은 턱밑까지 차올라 이슬로 맺힌다. 항구는 아랫도리 활짝 열어젖히고 만선의 꽃덤불을 들고 오시는 아버지 부푼 돛의 몸을 풀러 어머니에게 오신다. 만조의 시간은 만삭의 시간 달빛도 해산을 하고 꽃봉오리 울음을 낳았다. 2021년 1월 ..

<시조>아버지의 노래/최형만(2020 제8회 등대문학상 시부문 최우수작 당선작)

아버니의 노래 최형만 뭍아래 물기를 여닫던 밤 통통배는 물때만 되면 바다로 나갔다 바짓단까지 양말목을 올린 아버지는 기척도 없이 문턱을 넘으셨다 어린 나는 꿈결 같다 말했고 아버진 만선滿船이 부른 꿈이라 말했다 텅 빈 물간에 낯빛이 붉어지는 동안 목숨의 중심까지 맨몸으로 지났다 밍크고래의 주검이 하얗게 밀려든 날 비취색 물빛만 그물코에 꿰다가 공선空船으로 돌아오신 아버지 손등을 쓸어간 해풍에 바닷새도 떠나고 실금 간 어창은 실잠에 들었다 빈 몸으로 흔들릴 때마다 자줏빛 쓴물을 가슴에 들이는 아버지 은빛 물살을 물고 온 날치 떼도 없다 그믐처럼 흰 너울에 속내를 게워내고서야 통째로 몸을 여는 바다 해국의 꽃그늘이 엎드릴 때면 몇 개의 계절이 수평선을 넘어갔을까 파랑 친 바람이 환하게 길을 내자 물꽃을 쥔 ..

<시조>돌 /임영석

돌 임영석 돌을 주워 만져보다가 굴러온 길을 생각한다 자드락 길이 아니어도 비단길이 아니어도 하늘의 새털구름을 수만번 품었으리 진달래꽃 피는 봄은 내출혈로 쓰러지고 강물이 범람하면 사라진 길을 찾다 찾다 오백 리 은하수 길을 갈 길인 듯 바라본 돌. 내 삶이나 이 돌이나 외롭기는 마찬가지, 바위 같은 부모 잃고 떠돌고 떠돌다가 던져도 미련이 없는 조약돌이 되었다 물 속이든 불 속이든 주저없이 뛰어들어 씻기고 달구어져 속을 다 보였으니 이제는 어디에 놔도 부서지지 않으리 ㅡ계간『정형시학』(2020년 가을호) 2021년 1월 21일 오전 9시 16분 /목요일

<대상>돌문어라는 춤 /김은순(제12회 포항소재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돌문어라는 춤 김은순 저녁이 오는 방향으로 호미곶 등대는 서 있고요 파도는 저녁의 옆구리를 파고들고요 그때 큰 섬과 작은 섬 사이를 잇는 진달래꽃의 저녁이 부풀고 있었지요 절벽 밑의 동굴 속으로 무릎팍 걸음으로 오는 붉은 진달래꽃이 알을 낳으러 온대요 해조음이 모래 빛으로 흩어질 때 물밑에서도 꽃그늘이 오고 갯바람 언덕이 생기고 있었지요 침묵으로 환하고 아름다운 눈이 부시는 저 진다래꽃을 호미곶 사람들은 돌문어라고 불렀대요 그런 봄 바다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수경을 쑥으로 닦은 해녀들이 저 진달래꽃을 끄집어내어 말려두었대요 저 꽃잎 빨판 하나가 물 밖에서는 열두 달이라지요 진달래꽃은 호미곶이라는 얼굴이었지요 돌문어의 춤이었지요 2021년 1월 20일 20시 16분 /수요일

<시조>서라벌의 꿈 ⸺만고충신 /박제상

서라벌의 꿈 ⸺만고충신 박제상 임석 왕자를 구하려고 배 오른지 천육백 년 풍랑은 그쳤는데 질긴 인연 끊지 못해 못다 핀 그리움만이 별자리로 돋습니다 어른 님 기다리다 지쳐 잠든 치술령엔 몸 굳어 바위 되고 메아리는 살아남아 여인의 한恨 서린 바람 닮아있는 현해탄 목련꽃 환한 봄날 사당 근처 주막에서 낮술에 혼령 달래 먼 그날 생각하면 한 사내 주먹 쥔 꿈이 물비닐이 됩니다 ⸺계간『시조21』(2020년 가을호) 2021년 1월 20일 17시 08분 /수요일

<시조>바람의 이유 /이우걸

바람의 이유 이우걸 바람은 바람이어서 본적本籍이 없다 본적만이 아니라 본 적도 없다 그러나 정말 바람이 없는 것은 아니가 깃발이 휘날리는 어느 경기장에서 갈대가 피어 있는 강변 기슭에서 얼굴도 없이 흔드는 바람의 손을 본다 바람은 바람이어서 본적本籍이 없지만 바람에게 고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람은 물과 같아서 닿는 곳이 고향이다 ⸺계간『시조21』(2020년 가을호) 2021년 1월 20일 17시 00분 /수요일

<시조>완벽히 우러나는 것은 찻잎일까 시일까 /한복순

완벽히 우러나는 것은 찻잎일까 시일까 한복순 가지런한 맵시에 바람이 스며들어 맑은 물 닿으면 흐드러진 무질서 서서히 정돈된 체계 작은 우주 꺼낸 듯 무대회에 처음 나온 조심스런 소녀처럼 정중한 초대를 기다리는 두근거림 손모은 자그만한 포옹 숙녀로의 첫 의례 공기의 고요함을 흩트리지 않으면서 번지듯 파고들어 나긋이 깊어지는 찻잔 속 우러난 농담 입안에서 녹는다 ⸺계간『시조21』(2020년 가을호) 2021년 1월 20일 16시 51분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