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220

<시>돌의 찬 손이 이마를 짚어주다 /백향옥(202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돌의 찬 손이 이마를 짚어주다 백향옥 부풀어 오르는 흙이 좋아 맨발로 숲을 걸었다 바닷물에 발을 씻다가 만난 돌은 손바닥에 꼭 맞는 매끄러운 초승달 모양 열병을 앓을 때 이마를 짚어주던 당신의 찬 손 분주하게 손을 닦던 앞치마에 묻어 온 불 냄새, 바람 냄새, 놀란 목소리 곁에 앉아 날뛰던 맥을 지그시 눌러 식혀주던 손길 같은 차가운 돌을 쥐고 있으면 들뜬 열이 내려가고 멋대로 넘어가는 페이지를 눌러두기에 좋았는데 어느 날 도서관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져 깨져버렸다 몸 깊은 곳에서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놓친 손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두 동강 난 돌을 잇대보았지만 깨진 돌은 하나가 될 수 없고 가슴에서 자라난 실금이 무섭게 살아났다 식었다 뜨거워지는 온도 차이가 돌 안쪽에서 금을 내고 있었던 걸 몰랐다 이..

<시>핑고 /황정현(2021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핑고 황정현 극지의 순록은 우아한 뿔을 가졌다 거친 발굽으로 수만년을 걸어왔다 죽은 자식을 동토에 던지며 발길을 돌려야 했고 비틀 걸음으로 얼음산을 넘어야 했고 살점을 떼어 어린 자식의 배를 불려야 했고 뿔을 세워 침략자에 맞서야 했고 온몸을 쏟아 무리를 지켰다 죽어서도 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치열한 싸움에서 늘 이기고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당신은 무덤을 등에 지고 돌아왔다 무덤은 살고 당신을 죽었다 무덤 속에서 얼음이 자라고 있다 얼음은 흙을 밀어 올려 산이 될 것이다 얼음의 계절이 오면 순록은 바늘잎나무숲으로 순례를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당신의 길이 보인다 2021년 1월 22일 20시 18분 /금요일

<시>책등의 내재율 /엄세원(2021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책등의 내재율 엄세원 까치발로 서서 책 빼내다가 몇 권이 기우뚱 쏱아졌다 중력도 소통이라고 엎어진 책등이 시선을 붙들고 있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햇살이 배슥이 꽂혀와 반짝인다 정적을 가늠하며 되비추는 만화경 같은 긴 여운, 나는 잠시 일긋일긋 흔들린다 벽장에 가득 꽂힌 책 제목 어딘가에 나의 감정도 배정되었을까 곁눈질하다 빠져들었던 문장을 생각한다 감각이거나 괘락이거나 그날 가분에 따라 수십 번 읽어도 알 수 없는 나라는 책 한 권, 이 오후에 봉인된 것인지 추스르는 페이지마다 깊숙이 서려 있다 벽 이면을 온통 차지한 책등 그들만의 숨소리를 듣는다 어둠을 즐기는 안쪽 서늘한 밀착, 이즈음은 표지가 서로의 경계에서 샐기죽 기울 때 몸 안의 단어들이 압사되는 상상, 책갈피 속 한 송이 압화 같은 나는 허름하..

<시>면경 /이종호(2020 경북일보 문학대전 시부문 은상 당선작)

면경 이종호 핸드백에 자신의 얼굴을 넣고 다닙니다 여자의 하루가 거울 속에 있습니다 여자는 자신이 사라질까 봐 거울을 자주 봅니다 궁금한 얼굴을 해석해 주는 면경을 유심히 보다가 왼쪽과 오른쪽 표정이 다르다는 걸 알았습니다 거울 속에는 충혈된 눈과 마스카라의 눈물도 있습니다 우울한 손이 거울을 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깨지는 소리가 사람들에게 박힌듯합니다 여자 마음도 균열이 갔습니다 그녀는 거울 속의 제 얼굴을 잃었습니다 천의 눈을 갖은 거울은 천 개의 세상을 보고 싶어 쨍그랑, 깨졌을까 파편 속에서 반짝이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2021년 1월 22일 17시 44분 /금요일

<시>틈 /전종대(2020 경북일보 문학대전 시부문 금상 당선작)

틈 전종대 가까운 사이일수록 틈이 필요하다는 걸 안 것은 집 안에 가구들이 많아지고 부터이다 가구들은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 곁의 가구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오래되고 낡을수록 안으로부터 조금씩 부풀어오른 배들 벽과 벽 사이에도 틈이 숨 쉬고 있었다 이어진 레일 사이에도 틈을 두었다 단단할수록 간극이 필요하다 때로 틈이 사막 같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틈은 너를 너답게 하는 방식이다 건물을 견디게 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아내와 다투고 돌아서 바라보는 무연한 달빛 달빛과 달빛 사이에도 틈이 있을 것이다 아스팔트 검은 입술 터진 틈으로 가느다랗게 풀들이 외치며 걸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너무 꽉 다문 입술들은 갈라진다 2021년 1월 22일 17시 37분 /금요일

<시>서문시장 수제빗집 /박명자(2020 경북일보 문학대전 시부문 대상 당선작)

서문시장 수제빗집 박명자 빗물 질펀한 시장을 가로질러 노점에 닿는다 양은 솥 가득 수제비가 순식간에 만들어진다 연신 코를 벌렁거리며 게딱지 손으로 쉼 없이 수제비를 뜯어내는 그녀의 저 재빠른 손놀림, 겨울비 내렸고 생의 절반이 도망치듯 세상 밖으로 뚝 떨어져 나간 남편과 어린 자식 삼남매와 빚덩이만 밀가루 반죽처럼 게딱지 손 끝에 매달려 있다 팔자라 말하기엔 아직 잘라버리지 못한 것들 손끝에서 댕강댕강 양은솥 안으로 끊임없이 밀어 넣어야 살아가는 삶, 밀가루 반죽은 ‘뚝뚝’ 그녀을 잘라 먹는다 숨을 쉬는 동안 끝나지 않는 눈물을 밀랍하는 일 찜통에 담아두었던 밀가루 반죽 한 덩이를 들고서 밀려 나온 생의 한 가운데 모든 신경을 손 끝에 모아 쪼가리 쪼가리 양은솥 안으로 던져 넣는 수천개의 개딱지 2021..

<시>사과, 떨어지다 /고경자

사과, 떨어지다 고경자 모든 상황은 이렇게 이해되고 있었어 붉은 전쟁의 시작과 변곡점 어쩌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현실세계에서 발견되는 사과, 그 사과 하나가 떨어졌어 냉큼 줍기에는 체면이 망가질까봐 망서렸어 그때 우연히 한 여자가 다가와서 쓱 손을 내밀었어 보기엔 탐스럽고 이 세상의 맛이 아닐 것 같은 욕망의 빨강이 그녀 곁으호 다가왔어 내 것이었던 사과, 내 것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던 사과가 다른 여자 손에 들어가고, 더 매력적인 빨강 밤하늘의 별들이 다 떨어져버린 혼란의 밤 속에 불안이 왔어 하지만 난 사과가 없고 이제는 다시는 사과를 가질 수 없어 울고 싶었지만 눈물마저 그 여자가 가져가 버린 이런 불편한 관계, 첫째가 아닌 다음에 태어나는 얘들이 가지는 숙명인지도 모르지 세상의 모든 사과가..

<시조>애기똥풀 자전거 /박성규(2012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애기똥풀 자전거 박성규 색 바랜 무단폐기물 이름표 목에 걸고 벽돌담 모퉁이서 늙어가는 자전거 하나 끝 모를 노숙의 시간 발 묶인 채 졸고 있다 뒤틀리고 찢긴 등판 빗물이 들어치고 거리만큼 누빈 이력 체인에 감긴 아픔 이따금 바람이 와서 금간 생을 되돌린다 아무도 눈 주지 않는 길 아닌 길 위에서 금이 간 보도블럭에 제 살을 밀어 넣을 때 산 번지 골목 어귀를 밝혀주는 애기똥풀 먼지만 쌓여가는 녹슨 어깨 다독이며 은륜의 바퀴살을 날개처럼 활짝 펼 듯 페달을 밟고 선 풀꽃, 직립의 깃을 턴다 2021년 1월 22일 오전 9시 24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