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220

<시>오십견 /홍계숙

오십견 홍계숙 개 한 마리 키우실래요? 죽기 살기로 부딪쳐 본 적 있나요 진퇴양난이 붉은 잇몸을 드러냈을 때 느닷없이 달려드는 개를 보았죠 죽어야 사는 여자, 그 영화 포스터가 걸린 담벼락에서 여섯 살 때 친구에게 달려든 개가 내 심장을 삼켜 버렸어요 고통을 물어뜯은 타액이 뚝뚝 떨어지던 나는 심장 한 쪽이 없죠 개도 안 물어갈 심장 한 쪽이 남아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아, 가끔 비명이 빛보다 빠르죠 소리의 누런 이빨 사이로 시큰한 통증의 향내가 풍겨요 오른쪽 팔을 들어 올릴 때, 오르막길일까요, 내리막길일까요 외투의 중턱에 지퍼가 끼어 웃지도 울지도 못하네요 오십의 안감을 꽉 물고서 사육에도 내공이 필요해요 내공은 어깨 근육 속에 있죠 개가 짖을 대, 끼인 지퍼의 기분을 살짝 들어서 올려야..

<시>새의 이름은 미세 /홍계숙

새의 이름은 미세 홍계숙 미세라는 새가 태어났습니다 신종 조류입니다 먼 데서 날아온 혹은 바닥에서 날아오른 아주 작은 새입니다 너무 작아 조류가 아니라는 설도 있지만 하늘을 덮는 힘찬 날갯짓으로 보아 새의 무리가 분명합니다 주로 ㄴ자 ㅅ자형 경로로 공중에 유입됩니다 모든 철새들이 그렇듯 번식지와 월동지를 가릴 줄 압니다 봄은 떠돌이 새들이 창밖에 번식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무리가 많고 적음에 따라 하늘의 낮빛이 바뀝니다 나쁨 아주 나쁨 보통으로 하늘의 건디션이 손바닥에 전송됩니다 밀도가 다를 뿐 사시사철 공중을 장악하는 텃새로 점차 변해갑니다 식욕이 좋아 검고 날카로운 부리로 푸른 하늘을 뜯어먹고 사람의 식도와 기도로 스며들어 위와 폐에 둥지를 틉니다 하늘에서 초록 눈이 내리는 곳도 있습니다 숲은 어린 산..

<시조>숲 /이예진(2020, 오누이시조신인상 당선작)

숲 이예진 혼자서 걸으리라 집을 잠시 떠났습니다 일어서는 햇살마다 먼 길 하나 알려주지만 예고편 영화였을까 바람의 칼, 비립니다 시린 등피보다 타는 목이 더욱 말라 간격을 좁히는 사이 서로가 멀어졌습니다 꼿꼿이 선채로 죽은 고사목과 낮달 사이 구절초 흔들리는 빈자리로 돌아와서 꺾인 가지 내려놓고 구름마저 내려놓고 나 이제 한그루 나무, 숲이 되어 돌아섭니다 2021년 1월 25일 12시 38분 /월요일

<시조>비백飛白 /오은주(2020, 이호우·이영도시조문학상 여자 신인상 수상작품)

비백飛白 오은주 가야할 길 하나와 가고픈 길 사이에 못다 꾼 꿈이 있어 무릎 고쳐 앉으면 불현듯 돌아와 묻는 옛스승의 선문답 무뎌진 붓끝 비껴 여명이 오기까지 겨울밤 홀로 깨어 펼쳐든 원고지에 달빛이 한 획을 긋자 두 획을 지우는 바람 백 년에 백 년이 가도 꼿꼿이 걸어갈 길 멈췄다 다시 걷는 어느 초인의 손끝 따라 도도히 문장을 치며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시집『고요의 초상』(목언예원, 2020) 2021년 1월 25일 12시 44분 /월요일

<시조>어담魚談 /이창규(2020, 이호우·이영도시조문학상 남자 신인상 수상작품)

어담魚談 이창규 먼 산이 휘어지도록 달무리 내려 앉자 절반은 먹빛이고 또 반은 금빛이라며 노랗게 물든 아가미 두런두런 경을 읽네 물속의 삶이란 귀를 막고 입도 막은 무량하게 견디며 흘러보낼 시간이라 몸 하나 받드는 것이 이승의 몫이었네 중력을 버틴 삶에 부력까지 더해지는 짠내도 들지 못하는 밍밍한 경계에서 세상을 섬긴다는 말 수면 위로 올리네 ―계간『시조미학』(2019년 겨울호) 2021년 1월 25일 12시 30분 /월요일

<시조>대마리 전언* /하순희(2020, 이호우·이영도시조문학상 수상작품)

대마리 전언* 하순희 마음이 먼 길 떠나 돌아오지 않았지만 천둥 번개 지진 속 파편을 쓸어안아 포화로 녹슨 철모엔 마른 꽃대만 가득하다 말없이 누운 채로 목이 메는 백마고지 눈 뜬 버들개지만 바람에 흔들릴 뿐 발걸음 옮길 수 없는 난 망연히 서 있었다 포연은 사라졌으나 쉼 없이 명멸하는 붉은 눈 전광판이 피의 능선 비추는 곳 여린 목 뽑아올린 채 재두루미 날고 있다 *철원군 민통선 내, 지금은 해제된 마을. ―시조집『종가의 불빛』(고요아침, 2019) 2021년 1월 25일 오전 11시 32분 /월요일

<시>도서관 /신윤주(2021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도서관 신윤주 커다란 눈이 하늘을 올려다봐요. 수백의 실핏줄들이 네모난 바스켓을 움켜쥐어요. 하늘로 날아올라요. 바다의 표지는 잔잔해지고, 파도가 물러간 페이지마다 떠밀려온 해인초들이 엉켜붙어요. 해인초가 손끝에서 잘게 부서져요. 낮과 밤을 알 수 없는 시간이 이어져요. 키잡이는 가시 박힌 손으로 안개를 더듬으며 항로를 찾고 있어요. 날씨만 도와준다면 오늘 안으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만 같아요. 그곳에 만나야할 사람들이 있거든요. 시커먼 해초들이 대서양을 밀고 들어와 바다의 귓속에 이야기를 풀어 넣어요. 귀를 막아도 노랫소리가 들려요. 저기 범고래 떼가 몰려와요. 표류하는 낱말 조각들을 등에 실어 해안선으로 날라요. 실핏줄이 터지고 열기구가 휘청거려요. 행운이 문단 밖으로 달아나려 해요. 숨이 차..

<시>모천(母川) / 김철(2021 머니투데이 경제신춘문예 당선작)

모천(母川) 김철 시인 청계천 골목 어디씀 모천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양양의 남대천이 아닌 뜨근한 국수를 파는 국수 집 근처 어디라고 국수 발 같은 약도 적힌 메모를 들고 찾아간 미물도 명물로 만든다는 그 만물상 주물 틀에서 갓 나온 물고기 몇 마리 사왔지 수백 마리 수천 마리 붕어빵 구워낼 빵틀 파릇한 불꽃 위를 뒤집다 보면 세상의 모천을 찾아오는 물고기들 다 중불로 찍어낸 붕어빵 같지 한겨울 골목 경제지표가 되기도 하는 천원에 세 마리, 구수한 해류를 타고 이 골목 입구까지 헤엄쳐 왔을 따뜻한 물고기들 길목 어딘가에 차려놓으면 오고 가는 발길 멈칫거리는 여울이 되는 것이지 파닥파닥 바삭바삭 물고기 튀는 모천의 목전쯤 되는 영하의 파라솔 아래 엄마가 하루종일 서 있던 그곳 2021년 1월 23일 18..

<시>국수 /박은숙(2021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국수 박은숙 허리가 굽은 노인이 식당 구석진 자리에 앉아 국수 한 그릇을 시킨다 네 명의 자리에 세 명을 비워두는 식사 아마도 매 끼니를 빈자리들과의 합석이었을 것 같다 잘 뭉쳐져야 여러가닥으로 나뉠 수 있는 국수, 수백번의 겹이 한뭉치 속에 모이는 일, 뜨겁게 끓인 다음에 다시 찬물에 식혀야 질겨지는 음식, 그 부피를 많이 불리는 음식은 힘이 없다지만, 그래서 여럿이 먹어도 한 가지 소리를 내는 국수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는 저 노인의 슬하는 이남 삼녀의 망종(亡種) 꽃 필 곳 없는 행색이지만 한때는 다복했을 것이다. 잇몸으로 끊어도 잘 끊어지지 않는 빗줄기 같은 국수, 똬리를 튼 국수를 젓가락으로 쿡 찔러 풀어 헤친다 치아도 없는 노인이 먹는데 후루룩, 비 내리는 소리가 난다 비 오는 날 마루에서 ..

<시> 해감 / 설현민(2021 영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해감 설현민 새벽 물때다 사촌들과 바지락을 캐러 간다 이모를 도와야 했다 엄마, 엄마, 나는 한 번도 이모를 본 적 없는데요 가족이잖니 단숨에 알아차릴 거다 모래사장은 구덩이로 가득하다 저 안에서 움직이는 게 보이니 저기 너희 이모가 있잖아 움직이는 게 너무 많을 걸요 네 이모처럼 움직이는 것은 하나뿐이란다 등을 돌려 앉은 엄마는 쇠갈쾡이로 발 밑을 푹푹 퍼올린다 나는 양동이를 끌어안고 움푹한 바닥을 들여다본다 모래 속에는 모래가 들어 있다 어린 사촌들은 껍데기를 손에 쥐고 땅을 헤집는다 또 다른 껍데기를 주워 자랑한다 바지락을 얼마나 더 캐야 하나요 노인들의 배를 채우기에는 아직 모자라구나 이모는 왜 그렇게 깊이 파들어 가죠 깊은 곳엔 먹을 것이 없잖아요 네가 그렇게 태어났지 모래를 툭툭 털고 너를 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