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220

<시>문경새재를 읽다 /김겨리(제2회 문경새재문학상 우수상 당선작)

문경새재를 읽다 김겨리 한 걸음 한 걸음이 문장인 길이 있다 능선으로 제본된 목차마다 행간이 경건한 순례, 일목요연하게 펼쳐지는 둘레길이 고금으로 웅숭깊다 철릭을 입은 나무들이 호위를 받으며 첫 장을 넘기자 새재의 서곡인 주흘관에 당도하니 관문교 물소리가 풍경風磬이 울리듯 애잔한 건 쥘부채 펴듯 펼쳐진 서사를 다 서술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일출과 일몰로 빚은 윤슬로 밝히는 너덜길 따라 조곡관에 이르러 다리쉼하듯 산세를 굽어본다 발자국과 손길, 요凹와 철凸로 한 칸 한 칸 쌓은 성곽은 쉼표 없는 문장, 행갈이도 없이 편집된 질곡의 역사다 그랭이 공법으로 축조된 문장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차곡차곡 집필되고 있으므로 등고선에 밑줄 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능선을 넘는다 주흘관에서 조곡관을 지나 조령관에 이르고 ..

<시>‘조령진산도’를 읽다 /김영옥(제2회 문경새재문학상 대상 당선작)

‘조령진산도’를 읽다 김영옥 사라진 호랑이가 배꼽을 떨어뜨린 곳은 이쯤일 거야 성곽 옆구리에 엎드려 숨소리에 귀기울여봐 고깔 운무 쓰고 돌아앉은 어미 산 새재를 품에 안은 그림자도 우뚝한데 골짝 물길이 실핏줄로 감아 도는 등고선 한가운데 어느 멸망한 종족의 태실이 있지 예로부터 태를 묻은 곳엔 복이 들었지 장돌뱅이들이 등목을 하던 삼복더위에도 털옷을 걸치고서 평생을 떠돌았을 호랑이가 죽어서도 숲의 으쓱한 쇄골에 덮어둔 가죽은 하룻밤 묵어가는 길손들의 지름길 되고 봄비도 티 나지 않게 몸 낮추는 곳이 있다면 바로 여기 성황당 어디쯤일 거야 처녀치마로 둘러쳐진 아름드리 귀목을 노령의 소나무가 호위무사처럼 지키고 서있는 무림에서 아침햇살도 동티가 나지 않게 만다라를 그리는데 흙꽃 위에 두툼한 그늘막을 덮어주는..

<시>문경새재 /최재영(제1회 문경새재문학상 우수상 당선작)

문경새재 최재영 억새풀 우거진 고갯길에 달빛이 휘황하다 조령과 주홀을 곁에 둘러앉히고 굽이굽이 넘어 온 길을 둘러보는데, 달빛을 가득 품고서야 비로소 환해지는 옛길이다 새들은 벌써 다 건너갔을까 오래된 그리움들이 폭설처럼 쏟아지고 막사발은 천년의 비경을 품고 고요하다 수백리 물길을 여는 초점(草岾)*에 이르러 새재를 넘던 옛사람을 생각한다 물굽이 시퍼렇게 일으켜 세워도 못다 이룬 꿈이었을까 아슬아슬 벼랑길 비켜가는 바람은 계곡마다 눈물꽃을 피워내느라 허기진 산기슭 한 사발은 들이켰으리 먼 후일 가슴 뜨거워진 내가 찾아와 다시 맨발로 천년을 거슬러 오르리니, 달빛이 슬어놓은 푸른 전설이 아직도 구슬픈 아리랑곡조로 흘러가는 아, 문경새재 *초점(草岾)*: 낙동강 발원지 중 하나(태백 황지, 영주 순흥, 문경..

<시>문경새재 /심강우(제1회 문경새재문학상 우수상 당선작)

문경새재 심강우 문경에서 나는 박달나무는 홍두깨가 되었지요 주흘산 조령산을 넘어온 구름이 보자기란들 사시장철 굽이길 다듬잇돌을 시늉하던 걸음 성황당 고개에서 비손을 하던 여인, 자드락자드락 해동갑으로 잇대던 구김살 어이 다 싸맬 수 있을까요 때까치 울고 오목눈이 직박구리 추임새에 저 멀리 조령관 넘어 수안보 지나 한강으로 신수 환한 도포자락을 언제 또 보려는지, 옷고름에 젖은 사연 낙동강 굽이마다 세제리 세제, 눈 밝은 새들의 기별도 마애비로 남아 하인의 옹심도 선비의 큰 마음도 가루를 자청한 기와 조각이 되었지요 새재에 불던 바람은 길이 되었지요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한 줄로 꿴 오르막 내리막 패랭이 쓴 장꾼이 걷던 길 넘으면 시름이요 앉으면 푸념이라던 질경이 바랭이 억세게 핀 황톳길 가도 가도 첩첩산..

<시>나는 문경새재의 저녁으로 눕는다 /황종권)(제1회 문경새재문학상 대상 당선작)

나는 문경새재의 저녁으로 눕는다 황종권 이것은 곰의 갈비뼈 속으로 날아간 길이다 저 억새풀이 곰의 털이라는 것을 바람만이 안다 뻣뻣하지만 구불거리는 나무는 곰의 이빨 돌부리에 넘어진 무릎만이 비로소 신발 끈을 매고 첩첩 뿌리로부터 멀어지는 꽃들이 곰의 위장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발자국을 밀어올리는 것은 길이 아니라 곰의 숨소리, 으스스 별자리가 돋는 것도 제 등허리를 바위에 긁은 까닭이다 발목이 늘 벼랑인 사람들이 있다 떨어지지도 주저앉지도 못하는 힘으로 아비가 될 사람들은 발목에 불씨를 지폈으리라 아니 발바닥에 물집 잡히는 힘으로 신열 들키지 않게 제 짐을 산맥에 맡겼으리라 문경 새재, 산적도 피해가는 길 피처럼 붉은 달, 곰의 내장을 밝혀준다 울 수 없어 노래하고 노래할 수 없어 발목으로 저녁을 불러..

<시>봄 /송진권

봄 송진권 팔자를 고쳐 달아난 여자를 좆아 천리길을 걸어왔다 실뭉치 풀어 굴리며 요강뚜껑 굴리며 감발하고 괴나리봇짐 메고 봉두난발 폐포파립 흉중에 칼을 품고 핏발 선 눈으로 제비꽃에 눈 흘키고 꽃다지를 짓뭉개고 물어물어 찾아온 여자가 산다는 집 곱게 비질된 마당 가지런히 벗어둔 신발이 두 켤레 빨랫줄 가득 펄럭이며 날리는 기저귀 갓난것이 우는 소리 여자의 웃음소리에 섞인 굵은 남자의 목소리 밥숟가락 부딪는 소리 고샅 살구나무에 살구꽃만 피워놓고 뒤안 자두나무에 흰 자두꽃만 피워놓고 흉중에 칼은 물에 가라앉히고 실뭉치 헝클어뜨리고 요강뚜껑 던져버리고 나는 돌아왔다 ㅡ시집『자라는 돌』(창비, 2011) 2021년 1월 27일 15시 00분

<시> 몰래 얘뻤던 봄 /손순미

몰래 얘뻤던 봄 손순미 문을 닫은 지 오래인 카레 앞 자목자목 목력이 지고 있다 목련이 죽음의 향기를 내지른다 아무도 몰래 예뻤다가 색종이처럼 떨어져 내리는 목련,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나 여기 목력이 지고 있어요, 누가 확성기 좀 빌려줘요! 나는 트럭을 얻어 타고 마을을 돌며 목력의 임종을 알려야 하리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나 목련은 저 혼자 예뻤다가 어두운 카페 유리창에 제 몸을 비춰본다 화려한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목력의 울음이 흑흑, 떨어져 내린다 화양연화의 시절이 간다 나무 절벽 아래 떨어져 내리는 것이 있다 치마가 거꾸로 뒤집힌 채 낙화하는 헝겊 인형의 추락사를 본다 목련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푯말을 내걸었던 한 장의 봄날이 저만치 간다 아무도 없는 카페의 목련밭에 서서 허전한 ..

<시>다듬잇돌 /김정숙(2020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다듬잇돌 김정숙 가물가물 사라진 방망이 소리 황학동 풍물시장에 나와 앉아 깊이 잠겨있는 유년의 시절을 아프게 들어올리네 햇살 팽팽히 내려쬐는 날이면 이불홋청 양잿물에 묵은 설움 푹푹 삶아내어 춤추는 바지랑대 위에서 젖은 가슴 말리시던 어머니 옥양목 뻣뻣한 기억이 풀 먹이던 손 베이고 가네 외지에 나가계셨던 아버지 그곳에 새 살림 차리고 한 계절 만 집에 들어 와 가정을 돌아보고 떠날 때면 배웅 대신 방망이 두드리며 다듬잇돌 넘나들던 어머니의 붉은 목울대 눈치 뻔히 알고부터 혼자서도 두드려 보던 여린 손이 어머니 마음 바닥에 촘촘히 서려있는 눈물방울 어루 만졌네 다듬이 장단 밤 늦도록 추임새 흠뻑 매기고 나면 저 혼자 아물어가던 상처 어머니도 없는데 소리만 살아 아직도 생을 다듬질하는 방망이 내 귀를 훑고..

<시>지우개로 지워지지 않는 꿈 /하여진(2019 야학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지우개로 지워지지 않는 꿈 하여진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저녁의 문고리에 묶어두고 온 예순두 살 금례씨의 걱정이 교실 문턱까지 따라온다 틈만 나면 아픈 나이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희망야학 교실에는 저녁 7시가 켜진다 쪼글쪼글한 입술 괄약근이 열렸다 닫혔다 ㅏㅑㅓㅕㅗㅛㅜㅠ 비누 물방울처럼 소리가 둥둥둥 떠오르고 누리반 교실은 힘껏 달구어진다 뜨거운 물에 넣으면 원래대로 부풀어 오르는, 탁구공처럼 학생들의 찌그러진 마음이 부풀오 오른다 뭉턱뭉턱 빠져나간 젊음과 늘어나 버린 시력과 휘어지고 주름살 진 꿈을 구부리고 앉아 종이에 한 땀 한 땀 그려박는 글씨들 바다를 쓰면 바다 냄새가 나고 꽃을 쓰면 향기가 나고 새를 쓰면 새울음 소리가 나고 네모 칸 밖으로 자꾸 삐져나온 바다, 받침을 빠뜨린 태양을 지우고 다시..

<시>배두순 -황금송아지 /세한도 / 술래잡기(제10회 천강문학상 우수상)

1 황금송아지 배두순 코뚜레도 모르고 입가에 젖도 마르지 않은 새끼가 죽었다 송아지가 태어나면 온 동네의 경사였던 시절 그 금쪽 같은 송아지가 죽었다 두런두런하던 어른들은 가마솥에 불을 지폈다 장작불이 달아오르고 담장을 넘어오는 젖내를 감나무에 묶인 어미가 모를 리 없었다 나무를 들이받으면 토해내는 거대한 울음에 하늘이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었다 어른들은 부적의 붉은 댕기를 두 뿔에 걸어주고 막걸리 통을 대령하며 비손을 했다 그러한 사이, 새끼의 뱃속에서 나왔는지 보얀 젖 같은 국물이 가마솥에 가득했다 어른들은 국자를 집어넣어 국물을 퍼내고 도마를 눕협다 그들이 차려주던 국물과 고기를 맛나게 먹으며 배부른 식사를 하던 그날 붉은 도마 하나가 서쪽하늘 끝까지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길고 긴 핏빛 도마였다 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