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시>‘조령진산도’를 읽다 /김영옥(제2회 문경새재문학상 대상 당선작)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7.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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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조령진산도’를 읽다

 

김영옥

 

 

사라진 호랑이가 배꼽을 떨어뜨린 곳은 이쯤일 거야

성곽 옆구리에 엎드려 숨소리에 귀기울여봐

고깔 운무 쓰고 돌아앉은 어미 산

새재를 품에 안은 그림자도 우뚝한데

골짝 물길이 실핏줄로 감아 도는 등고선 한가운데

어느 멸망한 종족의 태실이 있지

예로부터 태를 묻은 곳엔 복이 들었지

장돌뱅이들이 등목을 하던 삼복더위에도

털옷을 걸치고서 평생을 떠돌았을 호랑이가

죽어서도 숲의 으쓱한 쇄골에 덮어둔 가죽은

하룻밤 묵어가는 길손들의 지름길 되고

봄비도 티 나지 않게 몸 낮추는 곳이 있다면

바로 여기 성황당 어디쯤일 거야

처녀치마로 둘러쳐진 아름드리 귀목을

노령의 소나무가 호위무사처럼 지키고 서있는 무림에서

아침햇살도 동티가 나지 않게 만다라를 그리는데

흙꽃 위에 두툼한 그늘막을 덮어주는 단풍 손은

어느 내생의 천수보살일까

길이 나기 전부터 탯줄을 품고 있던 이 숲은 보름달의 태반

오래전 궁예가 반달 같은 활을 내려놓고

신의 태엽을 발굴한 물의 나이테가 생사윤회의 바퀴라면

지아비의 발등 위로 불거진 핏줄은 사방으로 뻗은 산맥

못 박힌 발바닥에서 팔자로 갈라진 샛길은

괴나리봇짐 지고 호랑나비로 날아가는 활주로

이 울창한 안개들이 숨겨놓은 수구막이숲

길섶에 묻혀 있는 호랑이의 발품은 미래의 족보라지

예로부터 혈을 지른 자리에서 영웅이 났지

대대로 기를 받는 명당이 있다면

백두대간 등줄기를 제 피로 서늘하게 적시며

진달래꽃밭서덜로 새끼들을 밀어낸 어미의 자궁처럼

옴폭해서 아늑한 여기 이쯤일 거야

 

 

 

<제2회 문경새재문학상 당선작>

 

2021년 1월 27일 17시 29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