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220

오승철 -오름의 내력 /고추잠자리 19(제13회 한국예술상 수상작)

오름의 내력 오승철 얼마나 외로웠으면 창파에 섬이 되랴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 섬의 오름이 되랴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 오름 봉분이 되랴 하늘에는 별자리 땅에는 오름자리 오름 중에 북극성 같은 ‘높은오름’ 올라서면 나 또한 그대에 홀려 떠도는 오름이랴 일출봉과 산매봉 그 건너에 송악산 성산포와 서귀포 그 건너에 모슬포 올레길 따라온 삼포(三浦) 남극성이 끌고 간다 한라산 남녘자락 걸쭉한 입담 같은 “도끼다” 하기도 전에 쫙 벌어진 ‘산벌른내’ 가다가 떠오른 오름 섶섬 문섬 새섬 범섬 2021년 1월 30일 13시 54분 고추잠자리 19 오승철 그냥 한번 부서지고 돌아서는 파도처럼 추석날 몰래 왔다 돌아서는 파도처럼 어머니 숨비소리에 돌아서는 파도처럼 그래도 서너마리 하늘 하늘 남아서 섬 한 번 오름 한 번 ..

<시조>붉은머리오목눈이 /최영효

붉은머리오목눈이 최영효 외딴집 단칸방에 정붙이들 살고 있네 미혼모 오목눈이가 뻐꾸기를 기르고 사네 소문이 꼬리를 물고 사미니 새끼라 하네 피붙이가 버린 것을 살붙이가 알을 품어 제 새끼 내친 놈을 모성으로 거두고 있네 철새도 텃새가 되어 다둥이도 함께 사네 생명목 부리로 캐는 치사랑 내리사랑을 자연은 어머니라서 생명의 둥지라 하네 사랑엔 모반이 없네 사람의 땅 말고는 ―계간『시조미학』(2020년 가을호) 2021년 1월 29일 21시 23분

<시조>빈 /서숙희(제39회 중앙시조대상)

빈 서숙희 빈, 하고 네 이름을 부르는 저녁이면 하루는 무인도처럼 고요히 저물고 내 입에 셀로판지 같은 적막이 몰리지 어느 날은 처마 아래 묻어둔 밤의 울음 그 울음 푸른 잎을 내미는 아침이면 빈, 너는 갓 씻을 햇살로 반듯하게 내게 오지 심심한 창은 종일 구름을 당겼다 밀고 더 심심한 나는 구름의 뿔을 잡았다 놓고 비워둔 내 시의 행간에 번지듯 빈, 너는 오지 2021년 1월 29일 오전 9시 12분

<시조>구멍 /김나경(제39회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시조부문 당선작)

구멍 김나경 기둥이 풀려있는 단추를 그러안은 헐렁한 하품이다 배고픈 결속이다 열리고 닫히는 것이 지금 잠시 흔들린다 생명이 없는 것은 그 어둠을 알 수 없지 맨 처음 잠겼으니 맨 나중 풀린다는 입술이 어처구니없게 헛소리를 물고 있다 소통이나 화해 같은 말랑하고 둥근 약속 나가려는 너를 잡고 매달리다 떨어져도 한 가닥 실오라기는 변치 않을 흔적이다 2021년 1월 29일 오전 8시 54분

<시>탐매(探梅) / 임미리

탐매(探梅) 임미리 계단을 오르니 운선암 뒤편 각시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상, 가슴이 잘린 곳을 왼손으로 감싸고 있는 비운의 여인상, 깊이 물든 사연 바위에 깊이 새겨둔 채, 지금 어디쯤에서 붉은 꽃 피워내고 있는지 궁금해지네. 암자 모퉁이 보일 듯 말 듯 한 곳에 숨어있는 해우소에 쪼그리고 앉아 마애여래상의 사연 한 자락 모르는 척 버리려 하는데,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향기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네. 저 멀리서 홍매화 막 피어나네. 굳이 탐매에 나서지 않아도 되겠다는 설레는 마음을 숨기는 곳이 하필 해우소라 혼자 붉어진 내 마음을 알았을까. 홍매화도 덩달아 붉어지는 이 봄, 명지바람에 휘날리는 꽃잎의 향기도 황송한데 매화는 저만 모르는지 자꾸만 붉은 미소 터뜨리네. 나는 후다닥 각시바위에 오르네. 살며시..

<시>애련 동백/ 강정숙

애련 동백 강정숙 아직은 조금 오래 그리워해도 좋은 그때 그 동백꽃들 서둘러 지고 있다 슬픔을 꺼내놓기에 더없이 좋은 날 덧없는 애련일랑 파랑에나 얹혀주고 날리는 꽃잎꽃잎을 온몸으로 받는 바다 그 바다 흰 이랑에도 붉은 물이 드는 시간 무엇이 긋고 갔나 곡진한 너의 내부 잎들은 잎들끼리 서로를 적시는데 봄보다 먼저 온 이별에 숨이 붉다. 저 바다 ㅡ반년간『내일을 여는 작가』(2019년 상반기) 2021년 1월 28일 오전 11시 08분

<시>윤장대 /김성신(2017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윤장대 김성신 삼월 삼짓날은 윤장대를 돌리는 날 풍경소리 곰발 세우고 산자락은 그늘을 등지고 좌정한다 108배 올리던 법당에서 굽은 허리와 무릎 뼈 석탑처럼 일으켜 세우고 윤장대 돌리는 어머니의 마음에는 묵은 발원이 한 각씩 깊어진다 상현달 달무리 지는 밤 아이의 울음소리 희미하게 살아나고 안간힘을 토해내던 흑백의 한 생 몸속 경(經)이 된 통증을 한 올 한 올 부풀리니 저만큼 솔바람에 가슴 쓸리기도 해 앞뒤 없는 회한과 갈망은 두 손 맞잡고 배웅하듯 한 곳을 바라보니 이마 위에 맺힌 땀방울 눈물의 동의인 양 하염없이 흐른다 더 두툼해질 법문의 책장에 줄 맞추어 반듯하게 들어가 있을 어머니의 비워낸 몸을 나는 가만히 부축하여 본다 2021년 1월 28일 오전 10시 12분

<시>빅풋 /석민재(2017 신춘문예 당선작 세계일보)

빅풋 석민재 군함처럼 큰 발을 끌고 아버지가 낭떠러지까지 오두막집을 밀고 갔다가 밀고 왔다가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스텝을 맞추며 말기 암, 엄마를 재우고 있다 죽음을 데리고 놀고 있다 죽을까 말까 죽어줄까 말까 엄마는 아빠를 놀리고 있다 아기처럼 엄마처럼 절벽 끝에서 놀고 있다 ≪2017 신춘문예 당선작 세계일보≫ ―시선집『2017년 신춘문예 당선시집』(문학세계사, 2017) 2021년 1월 28일 오전 9시 46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