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220

<시조>꽃 진 자리 /배경희(중앙일보 2020년 9월 초대시조)

〈초대시조〉 꽃 진 자리 배경희 봄이 오는 첫 길목에 목련이 피었다 초록이 길 낼 무렵 목련은 지고 있다 한순간 면목가증面目可憎처럼 아, 하고 꽃은 졌다 몸이 먼저 말하듯 없는 병도 터지고 세상 한켠 비바람에 한때는 가고 없다 세월은 꽃 핀 자리보다 진 자리가 길다 ―계간『불교문예』(2014년 여름호) 2021년 2월 2일 오후 12시 54분

<시조>편백나무 숲(중앙일보 시조백일장 2021년 1월 차상 수상작)

편백나무 숲 이성보 산중의 화선지에 정적이 먹을 갈아 빽빽이 휘갈겨 쓴 홀소리 ‘ㅣ’자들로 고요가 붓대 잡고서 서체 계속 다듬는다 차분한 정자체를, 활기찬 흘림체를 텃새와 말벗바람 의견이 분분해도 수백 년 풍채 힘 모아 필획수련 끊임없다 하늘 땅 맞닿도록 치솟는 기세만큼 넉넉히 양팔 낮춰 누운 풀도 다 보듬고 획 굵은 정신일도(精神一到)를 뿜어내는 피톤치드 2021년 2월 2일 오전 9시 05분

<시조>고궁(古宮) 문살 /김호(중앙일보 시조백일장 2021년 1월 장원 수상작)

고궁(古宮) 문살 김호 은밀히 새 나오는 숱한 비밀 들었지만 격자의 틀 안에서 침묵으로 재웠습니다 세월의 모진 비바람 창호지는 찢어지고 안과 밖의 소리를 조화로이 품으며 귀 열어 조심스레 경계를 지켰습니다 깍지 낀 손 놓지 않고 시간을 묻었습니다 결이 트고 갈라져 온 몸이 삐걱대도 지켜온 지조와 결의(決意) 잊지 않았습니다 빛바랜 육신이지만 향기만은 남겼습니다 2021년 2월 2일 오전 8시 52분

<시>멸치똥 /안이숲(2019 제19회 평사리문학상 수상작)

멸치똥 안이숲 멸치 똥을 깐다 변비 앓은 채로 죽어 할 이야기가 막힌 삶보다 긴 죽음이 달라붙은 멸치를 염습하면 방부제 없이 잘 건조된 완벽한 미라 한 구 바다의 비밀을 까발라줄까 삶은 쓰고 생땀보다 짜다는 걸 미리 알려줄까, 까맣게 윤기나는 멸치똥 죽은 바다와 살아있는 멸치의 꼬리지느러미에 새긴 섬세한 증언 까맣게 속 탄 말들 뜬 눈으로 말라 우북우북 쌓인다 오동나무를 흉내낸 종이관 속에 오래 들어 있다가 사람들에게 팔려온 누군가의 입맛이 된 주검 소금기를 떠난 적이 없는 가슴을 모두 도려낸 멸치들 육수에 풍덩빠져 한때 뜨거웠던 시절을 우려낸다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뼈를 남기고 객사한 미련들은 집을 떠나온 지 얼마만인가 잘 비운 주검 하나 끓이면 우러나는 파도는 더욱 진한 맛을 낸다 2021년 2월 ..

<시>싸리나무 /김향숙(2018 제18회 평사리문학상 수상작)

싸리나무 김향숙 종아리에 싸리나무 흔적이 있네 아버지 꾸중이 다녀간 날이었네 천방지축의 나이 주먹을 쥐고 이를 앙다물 때 여린 싸리나무 회초리 흔들리는 중심을 잡아주었네 눈물과 후회 원망이 묻어 있는 그 기억을 만지면 참싸리꽃으로 환하게 피어나네 소쿠리와 채반이 되던 싸리나무가 뭄에 스며들어 나를 일으켰네 쓰디쓴 그 맛 종아리에 새겨진 문신이 약초가 되기까지 한참을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가 나의 싸리나무였다는 걸 깨달아 내 여린 뼈가 단단히 여물어갔네 여름이 지날 때쯤 뒷산에 피던 분홍꽃 사방에 널렸어요 지나치기만 했는데 회초리를 든 아버지가 보이네 낭창낭창 휘어져도 부러지지 말라던 말씀 늙어 회초리를 들 기운조차 없으셔서 내가 싸릿대를 꺾었네 싸리꽃은 여전히 피어나고 밑줄을 긋던 말씀은 내 몸에 붉은 꽃..

<시>끈 혹은 줄에 관한 단상 /지연구(2017 제17회 평사리문학상 수상작)

끈 혹은 줄에 관한 단상 지연구 택배로 부칠 상자를 묶을 포장끈이 모자라 끈을 이어 묶다가 짧은 끈을 바라보네 애초부터 가진 끈이 짧았던 아버지 당신 끈을 내게 이어주려 무진 애를 쓰셨지 국민학교 사 년, 남의 집 더부살이 그 끈에 묶인 매듭이 모난 돌멩이처럼 늘 가슴에 배겨 아팠네 월요일 아침 애국 조회시간 줄서기가 삐뚤어져 얻어맞던 선생님의 회초리는 좋은 줄을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 같았네 친구들의 질기고 화려한 나일론 줄에 새끼줄 같은 나의 끈을 슬쩍 묶어보았지만 신분이 다른 줄은 금새 풀어지고 말았네 시화공단, 꽤나 큰 포장끈 공장에서 삼십여 년 끈을 만지며 살았지만 늘어진 삶의 끈을 팽팽하게 당겨주지 못했네 너무나 느슨하고 헝클어져버려서 줄에 걸려 넘어진 생활이 동강동강 끊어지고 말았네 토막난 생..

<시>나비족 /홍일표

나비족 홍일표 해변에서 생물연대를 알 수 없는 나비를 주웠다. 지구 밖 어느 행성에서 날아온 쓸쓸한 연애의 화석인지 나비는 날개를 접고 물결무늬로 숨 쉬고 있었다 수 세기 거쳐 진화한 한 잎의 사랑이거나 결별인 것 공중을 날아다녀 억을 잊은 듯 나비는 모래 위를 굴러다니고 바닷물에 온몸을 적시기도 한다 아이들은 그것이 나비인 줄도 모르고 하나둘 주머니에 넣는다 이렇게 무거운 나비도 있나요? 바람이 놓쳐버린 저음의 멜로디 이미 허공을 다 읽고 내려온 어느 외로운 영혼의 밀서인지도 모른다 공중을 버리고 내려오는 동안 한없이 무거워진 생각 티스푼 같은 나비의 두 날개를 펴본다 날개가 전부인 고독의 구조가 단단하다 찢어지지도 접히지도 않는 바닷속을 날아다니던 나비 ―시집『밀서』(문예중앙, 2015) 2021년 ..

<시조>말들의 사막 /이윤훈 (2021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말들의 사막 이윤훈 눈물이 사라진 곳 사막이 자라난다 풍화된 말에 덮혀 잠귀 어두운 길 눈을 뜬 붉은 점자들 혓바닥에 돋는다 금모래빛 말들이 줄을 이뤄 쌓인 언덕 전갈이 잠행하는 미끄러운 행간 속에 슬며시 꿈틀거리며 입을 벌린 구렁들 눈물샘 깊은 데서 오래 맑힌 말들 발걸음 자국마다 한 그루씩 심어놓아 파릇한 수직의 빛들 방사림을 이루고 신열 오른 말들이 아른대는 신기루 속 물 냄새 맡은 낮달 사막을 건너 간다 어디서 선인장 피나 마른 입 속 뜨겁다 2021년 1월 30일 15시 3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