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달밤 /이종문 달밤 이종문 그 소가 생각난다, 내 어릴 때 먹였던 소 사르비아 즙을 푼 듯 놀이 타는 강물 위로 두 뿔을 운전대 삼아 타고 건너오곤 했던, 큰누나 혼수 마련에 냅다 팔아먹어 버린, 하지만 이십리길을 터벅터벅 걸어와서, 달밤에 대문 앞에서 음모 –하며 울던 소 ―시조집 『그때 생각나서 웃네』(시학, 2019) 2021년 2월 6일 오전시 11분 41분 월요일 2021 다시 필사 시 2021.02.08
<시조>복사꽃 그늘 /이승은 복사꽃 그늘 이승은 골짝에 접어들수록 마음처럼 붉어진 길 눈물도 그렁그렁 꽃잎따라 필 것 같다 고샅길 홀로된 집 한 채 숨어 우는 너도 한 채 복사꽃 그늘에서 삼키느니, 밭은 기침 선홍의 내 아가미 반짝이며 떠돌다가 끝내는 참지 못하고 가지마다 뱉어낸 꽃 우리 한때 들끓었던 것 참말로 다 참말이던 것 날카롭게 모가 서는 언약의 유리조각에 메마른 혀를 다친다, 오래고 먼 맹세의 봄 ―시집『환한 적막』(동학사, 2007) 2021년 2월 6일 20시 20분 토요일 2021 다시 필사 시 2021.02.06
<시조>무게고(考) /박시교(2020년 제18회 유심작품상 시조부문 수상작) 무게고(考) 박시교 온종일 모은 폐지 한 리어카 이천오백원 몇십억 아파트 깔고 사는 호사와는 견줄 수 없다지만 경건한 그 삶의 무게 결코 가볍지 않다 2021년 2월 6일 18시 52분 토요일 2021 다시 필사 시 2021.02.06
<시조>임채성 -꽃마니/대치동/둥지/날아라, 두루미/사랑이 사랑에게(2020 제2회 정음시조문학상) 꽃마니 임채성 심마니 삼을 찾듯 꽃을 좇아 꽃마니라 아내 몰래 할부로 산 카메라 둘러메고 꽃 앞에 납작 엎드린 꽃마니가 있었네 야생의 꽃을 탐해 야생으로 사노라면 해돋이 해넘이를 마른 숲에 묻어두고 뭇 꽃과 눈을 맞추는 꽃마니가 있었네 노루귀 처녀치마 앉은부채 얼레지까지 그 싹 행여 밟을세라 고승 같은 걸음발로 본 꽃도 보고 또 보는 꽃마니가 있었네 성에 긴 가슴 속에 못다 일군 꽃밭뙈기 홀로 피는 봄꽃처럼 도시를 멀리한 채 꽃잎에 술을 따르는 꽃마니가 아직 있네 2021년 2월 6일 오전 11시 34분 토요일 대치동 임채성 여기선 개들마저 혀꼬부랑 소리로 짓네 새벽부터 자정까지 노랑버스 좇고 쫓다 다국적 친구들 앞에 제 주인 자랑하듯 더 놓이 서기 위해 키를 높인 아파트들 24시간 편의점 같은 학원 불.. 2021 다시 필사 시 2021.02.06
김양희 -절망을 뜯어내다/나팔꽃이 나팔꽃에게/나무에 든 밥알/개밥그릇 앞에서/발간 장화(2019 제1회 정음시조문학상) 절망을 뜯어내다 김양희 우리를 탈출한 고릴라가 돌아다니다 어떻게 나갔어 대체 비결이 뭐야 철망을 하루에 한 칸씩 나도 몰래 뜯었지 절망을 뜯어냈다고? 철망을 뜯어냈다고! 오타를 고치려다 눈이 주운 어휘 한 잎 절망을 하루에 한 줌 몰래 뜯어내야지 2021년 2월 6일 오전 10시 36분 --------------- 나팔꽃이 나팔꽃에게 김양희 지하철에서 엄마가 아이에게 이른다 기둥 꼭 잡고 있어 사람들에게 쓸려나가 휩쓸고 지나가는 것 큰바람만 아니지 끝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사람 속에 나팔꽃 새순처럼 기둥에 매달린 아이 자동문 열릴 때마다 더 꼭 매달리는 아이 2021년 2월 6일 오전 10시 40분 ----------- 나무에 든 밥알 김양희 나뭇잎 다 내려놓고 침묵에 휩싸이던 햬화로가 잠시 기계음에 묻.. 2021 다시 필사 시 2021.02.06
<동시>노루궁뎅이버섯 /김진광 노루궁뎅이버섯 김진광 얼마나 놀라 달아났으면 졸참나무, 떡갈나무 가지에 엉덩이가 걸릴 줄도 모르고 도망갔을까? “휴! 살았다!”하고 뒤돌아본 노루가 얼마나 놀랐을까? “내 엉덩이 어디 갔지?”하고 얼마나 당황했을까? ―『아동문예』(2021년 1. 2월호) 2021년 2월 5일 19시 25분 2021 다시 필사 시 2021.02.05
<동시>낮달 /고윤자 낮달 고윤자 베짱도 좋다. 해는 밤에 한 번도 놀러 오지 않는데 달은 낮에도 가끔 가끔 놀러 나온다. ―『배짱도 좋다』 (아동문예, 2020) 2021년 2월 5일 19시 04분 2021 다시 필사 시 2021.02.05
<시조>석류 /김경옥(제12회 열린시학상) 석류 김경옥 1 놓고도 먼 별빛 내 손으로 당겨와 그대로 담아보리라 그대처럼 살리라 단단한 껍질을 벗고 불꽃처럼 환하게 2 허술하게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는 나이 햇살에 받아쓴 詩를 그릇에 담았습니다 더듬어 걸어온 길이 달큰 새콤 시립니다 3 제 안에 든 원석을 두 손으로 닦으며 뷹운 압술의 작은 노래 섬기는 가을날 마침내 금이 간 가슴 둥굴게 빛납니다 ―계간『열린시학』(2020, 겨울호) 2021년 2월 5일 18시 12분 2021 다시 필사 시 2021.02.05
<시조>김삿갓 무덤에서 /김 전(2012 제19회 현대시조문학상 수상작>) 김삿갓 무덤에서 김 전 그대 절뚝이며 온 산하 누비면서 언제나 저려오는 가슴 움켜 잡고 오늘은 빈 삿갓 걸어두고 여기에 누웠는가 마지막 남은 몇 닢 훌훌 던져주며 막걸리 한 사발로 온 세상을 휘어잡던 그대의 터털 웃음이 태백산을 뒤흔든다 삿갓으로 감아올린 은유의 몸짓으로 구름도 바람도 詩 한 자락 걸쳐놓고 그대의 무덤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2021년 2월 5일 16시 19분 2021 다시 필사 시 2021.02.05
<시조>향적봉 /정현대(2013 제20회 현대시조문학상 수상작) 향적봉 정현대 눈꽃 속에 피어나는 설산의 겨울 향기 파아란 하늘 아래 구상나무 주목 군상 겹겹이 정을 쌓으며 새봄을 준비한다 사람이 산다면 천년 만년 살 것인가 이 순간 이 기쁨 가슴에 차오를 때 산과 들 흰 눈을 쓰고 햇살 아래 빛난다 2021년 2월 4일 20시 03분 2021 다시 필사 시 2021.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