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220

<시조>달밤 /이종문

달밤 이종문 그 소가 생각난다, 내 어릴 때 먹였던 소 사르비아 즙을 푼 듯 놀이 타는 강물 위로 두 뿔을 운전대 삼아 타고 건너오곤 했던, 큰누나 혼수 마련에 냅다 팔아먹어 버린, 하지만 이십리길을 터벅터벅 걸어와서, 달밤에 대문 앞에서 음모 –하며 울던 소 ―시조집 『그때 생각나서 웃네』(시학, 2019) 2021년 2월 6일 오전시 11분 41분 월요일

<시조>복사꽃 그늘 /이승은

복사꽃 그늘 이승은 골짝에 접어들수록 마음처럼 붉어진 길 눈물도 그렁그렁 꽃잎따라 필 것 같다 고샅길 홀로된 집 한 채 숨어 우는 너도 한 채 복사꽃 그늘에서 삼키느니, 밭은 기침 선홍의 내 아가미 반짝이며 떠돌다가 끝내는 참지 못하고 가지마다 뱉어낸 꽃 우리 한때 들끓었던 것 참말로 다 참말이던 것 날카롭게 모가 서는 언약의 유리조각에 메마른 혀를 다친다, 오래고 먼 맹세의 봄 ―시집『환한 적막』(동학사, 2007) 2021년 2월 6일 20시 20분 토요일

<시조>임채성 -꽃마니/대치동/둥지/날아라, 두루미/사랑이 사랑에게(2020 제2회 정음시조문학상)

꽃마니 임채성 심마니 삼을 찾듯 꽃을 좇아 꽃마니라 아내 몰래 할부로 산 카메라 둘러메고 꽃 앞에 납작 엎드린 꽃마니가 있었네 야생의 꽃을 탐해 야생으로 사노라면 해돋이 해넘이를 마른 숲에 묻어두고 뭇 꽃과 눈을 맞추는 꽃마니가 있었네 노루귀 처녀치마 앉은부채 얼레지까지 그 싹 행여 밟을세라 고승 같은 걸음발로 본 꽃도 보고 또 보는 꽃마니가 있었네 성에 긴 가슴 속에 못다 일군 꽃밭뙈기 홀로 피는 봄꽃처럼 도시를 멀리한 채 꽃잎에 술을 따르는 꽃마니가 아직 있네 2021년 2월 6일 오전 11시 34분 토요일 대치동 임채성 여기선 개들마저 혀꼬부랑 소리로 짓네 새벽부터 자정까지 노랑버스 좇고 쫓다 다국적 친구들 앞에 제 주인 자랑하듯 더 놓이 서기 위해 키를 높인 아파트들 24시간 편의점 같은 학원 불..

김양희 -절망을 뜯어내다/나팔꽃이 나팔꽃에게/나무에 든 밥알/개밥그릇 앞에서/발간 장화(2019 제1회 정음시조문학상)

절망을 뜯어내다 김양희 우리를 탈출한 고릴라가 돌아다니다 어떻게 나갔어 대체 비결이 뭐야 철망을 하루에 한 칸씩 나도 몰래 뜯었지 절망을 뜯어냈다고? 철망을 뜯어냈다고! 오타를 고치려다 눈이 주운 어휘 한 잎 절망을 하루에 한 줌 몰래 뜯어내야지 2021년 2월 6일 오전 10시 36분 --------------- 나팔꽃이 나팔꽃에게 김양희 지하철에서 엄마가 아이에게 이른다 기둥 꼭 잡고 있어 사람들에게 쓸려나가 휩쓸고 지나가는 것 큰바람만 아니지 끝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사람 속에 나팔꽃 새순처럼 기둥에 매달린 아이 자동문 열릴 때마다 더 꼭 매달리는 아이 2021년 2월 6일 오전 10시 40분 ----------- 나무에 든 밥알 김양희 나뭇잎 다 내려놓고 침묵에 휩싸이던 햬화로가 잠시 기계음에 묻..

<시조>석류 /김경옥(제12회 열린시학상)

석류 김경옥 1 놓고도 먼 별빛 내 손으로 당겨와 그대로 담아보리라 그대처럼 살리라 단단한 껍질을 벗고 불꽃처럼 환하게 2 허술하게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는 나이 햇살에 받아쓴 詩를 그릇에 담았습니다 더듬어 걸어온 길이 달큰 새콤 시립니다 3 제 안에 든 원석을 두 손으로 닦으며 뷹운 압술의 작은 노래 섬기는 가을날 마침내 금이 간 가슴 둥굴게 빛납니다 ―계간『열린시학』(2020, 겨울호) 2021년 2월 5일 18시 12분

<시조>김삿갓 무덤에서 /김 전(2012 제19회 현대시조문학상 수상작>)

김삿갓 무덤에서 김 전 그대 절뚝이며 온 산하 누비면서 언제나 저려오는 가슴 움켜 잡고 오늘은 빈 삿갓 걸어두고 여기에 누웠는가 마지막 남은 몇 닢 훌훌 던져주며 막걸리 한 사발로 온 세상을 휘어잡던 그대의 터털 웃음이 태백산을 뒤흔든다 삿갓으로 감아올린 은유의 몸짓으로 구름도 바람도 詩 한 자락 걸쳐놓고 그대의 무덤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2021년 2월 5일 16시 19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