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김양희 -절망을 뜯어내다/나팔꽃이 나팔꽃에게/나무에 든 밥알/개밥그릇 앞에서/발간 장화(2019 제1회 정음시조문학상)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2. 6.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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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5편>

 

절망을 뜯어내다

 

김양희

 

 

우리를 탈출한 고릴라가 돌아다니다

 

어떻게 나갔어

대체 비결이 뭐야

 

철망을 하루에 한 칸씩 나도 몰래 뜯었지

 

절망을 뜯어냈다고?

철망을 뜯어냈다고!

 

오타를 고치려다 눈이 주운 어휘 한 잎

 

절망을 하루에 한 줌 몰래 뜯어내야지

 

2021년 2월 6일 오전 10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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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꽃이 나팔꽃에게

 

김양희

 

 

지하철에서 엄마가

아이에게 이른다

기둥 꼭 잡고 있어

사람들에게 쓸려나가

휩쓸고 지나가는 것

큰바람만 아니지

 

끝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사람 속에

나팔꽃 새순처럼

기둥에 매달린 아이

자동문 열릴 때마다

더 꼭 매달리는 아이

 

 

2021년 2월 6일 오전 10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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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든 밥알

 

김양희

 

 

나뭇잎 다 내려놓고 침묵에 휩싸이던

햬화로가 잠시 기계음에 묻힌다

 

가지를

툭, 툭 자르며

혼자 우는 전기톱

 

톱밥이 바람 타고 첫눈처럼 흩날린다

모든 밭엔 울음이 말아져 있는 걸까

공복의 가지를 친다

나무에 든 밥알들

 

 

2021년 2월 6일 오전 10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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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그릇 앞에서

 

김양희

 

뒤꼍 자지러지는 까치 울음소리

 

웬 까치 비명이 저렇게 요람하담

 

창 너머 살펴보다가 나도 자지러진다

 

이빨에 무참히 찍혀 버둥거리는 까치

 

필시 절규하는 건 아내나 남편일 것

 

새끼들 거둬먹이려다 개밥그릇 앞에서

 

 

2021년 2월 6일 오전 10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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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장화

 

김양희

 

 

여인을 움직이는 목 짧은 고무장화

바람도 따라잡기 버거울 만큼 재바르다

바퀴를 달아났을까

소리보다 먼저 온다

 

밥집 문을 닫는 무교동 아홉시가

바닥에 주저앉아 하루를 벗겨낸다

장화 안

투명 비닐봉지

까만양말 하얀 발

 

어떻게 살아냈는지 다 말하지 않아도

불어터진 발 무늬 찍히는 바닥은 안다

첫새벽

눈밭 질러간

어미 노루 발자국

 

 

 

<2019 제1회 정음시조문학상>

2021년 2월 6일 오전 10시 58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