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작 5편>
꽃마니
임채성
심마니 삼을 찾듯 꽃을 좇아 꽃마니라
아내 몰래 할부로 산 카메라 둘러메고
꽃 앞에 납작 엎드린 꽃마니가 있었네
야생의 꽃을 탐해 야생으로 사노라면
해돋이 해넘이를 마른 숲에 묻어두고
뭇 꽃과 눈을 맞추는 꽃마니가 있었네
노루귀 처녀치마 앉은부채 얼레지까지
그 싹 행여 밟을세라 고승 같은 걸음발로
본 꽃도 보고 또 보는 꽃마니가 있었네
성에 긴 가슴 속에 못다 일군 꽃밭뙈기
홀로 피는 봄꽃처럼 도시를 멀리한 채
꽃잎에 술을 따르는 꽃마니가 아직 있네
2021년 2월 6일 오전 11시 34분 토요일
대치동
임채성
여기선 개들마저 혀꼬부랑 소리로 짓네
새벽부터 자정까지 노랑버스 좇고 쫓다
다국적 친구들 앞에 제 주인 자랑하듯
더 놓이 서기 위해 키를 높인 아파트들
24시간 편의점 같은 학원 불빛 깜박일 때
가로수 가슴팍에도 등급표가 내걸리고
앞서간 발자국을 따라잡아 지우려는 듯
한 번에 두세 걸음 축지법을 쓰는 초침
대치맘* 구둣발소리 시계바늘 끌고 가네
*대치동 엄마를 일컫는 신조어
2021년 2월 6일 오전 11시 41분
둥지
임채성
불빛보다 달빛이 밝은 산동네 언덕빼기
등은 살짝 굽었어도 늘 푸른 소나무에
신혼의 까치 한 쌍이 포르릉 날아들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새 날을 노래하며
뼘들이로 물어나른 삭정이와 지푸라기
굵다란 가지 안쪽에 둥지 하나 틀었다
솔 그늘에 해가 들자 돌풍이 일어났다
그악스레 달려드는 까마귀 일족 앞에
갓 낳은 알은 깨지고 바람벽도 무너졌다
까치울음 맴을 도는 재개발 정비구역
투구 쓴 철거반원 판잣집 울러멜 때
뉴타운 보금자리주택 분양이 시작된다
2021년 2월 6일 오후 12시 15분 토요일
날아라, 두루미
임채성
자판기 커피 뽑다 새 한 마리 다시 본다
우수리도 돌려받은 오백 원 주화 속에
양 날개 활짝 펼친 채 부조된 저 두루미
어디로 날고 싶었나, 좁은 목 길게 빼고
하릴없이 바라보는 납빛에 잠긴 하늘
몸값을 저당 잡혀도 이민의 꿈은 멀다
주물공장 뜨거운 꿀둑 지나온 황사비가
거품 문 개울 따라 몸 푸는 그날에도
갈맷빛 스러진 산엔 피가 돌고 있을까
소나무 참나무가 종이컵을 찍는 도시
뻥 뚫린 고목 가슴 콘크리트 땜질하듯
두루미 숨찬 울음이 쇳소리로 울린다
2021년 2월 6일 오후 12시 20분 토요일
사랑이 사랑에게
임채성
지하철 계단 아래로 쓸쓸히 몸을 숨기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본 적 있나
전동차 바퀴 소리가 쟁쟁 울던 그런 날
여름의 손을 놓자 차디찬 겨울이 왔네
승차를 거부하면 전원 끊은 스크린도어
터널은 너무 길었네
봄도 따라 연착이네
부은 목젖 안 뵈려고 시퍼렇게 뱉던 말들
헐거워진 늑골 사이 메아리로 울려올 때
어제는 허깨비던가,
어디에도
없네
너는
<2020 제2회 정음시조문학상>
2021년 2월 6일 오후 12시 26분 토요일
'2021 다시 필사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조>복사꽃 그늘 /이승은 (0) | 2021.02.06 |
---|---|
<시조>무게고(考) /박시교(2020년 제18회 유심작품상 시조부문 수상작) (0) | 2021.02.06 |
김양희 -절망을 뜯어내다/나팔꽃이 나팔꽃에게/나무에 든 밥알/개밥그릇 앞에서/발간 장화(2019 제1회 정음시조문학상) (0) | 2021.02.06 |
<동시>노루궁뎅이버섯 /김진광 (0) | 2021.02.05 |
<동시>낮달 /고윤자 (0) | 2021.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