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시조>임채성 -꽃마니/대치동/둥지/날아라, 두루미/사랑이 사랑에게(2020 제2회 정음시조문학상)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2. 6.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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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장작 5>

 

꽃마니

 

임채성

 

 

심마니 삼을 찾듯 꽃을 좇아 꽃마니라

아내 몰래 할부로 산 카메라 둘러메고

꽃 앞에 납작 엎드린 꽃마니가 있었네

 

야생의 꽃을 탐해 야생으로 사노라면

해돋이 해넘이를 마른 숲에 묻어두고

뭇 꽃과 눈을 맞추는 꽃마니가 있었네

 

노루귀 처녀치마 앉은부채 얼레지까지

그 싹 행여 밟을세라 고승 같은 걸음발로

본 꽃도 보고 또 보는 꽃마니가 있었네

 

성에 긴 가슴 속에 못다 일군 꽃밭뙈기

홀로 피는 봄꽃처럼 도시를 멀리한 채

꽃잎에 술을 따르는 꽃마니가 아직 있네

 

 

202126일 오전 1134분 토요일

 

대치동

 

임채성

 

 

여기선 개들마저 혀꼬부랑 소리로 짓네

새벽부터 자정까지 노랑버스 좇고 쫓다

다국적 친구들 앞에 제 주인 자랑하듯

 

더 놓이 서기 위해 키를 높인 아파트들

24시간 편의점 같은 학원 불빛 깜박일 때

가로수 가슴팍에도 등급표가 내걸리고

 

앞서간 발자국을 따라잡아 지우려는 듯

한 번에 두세 걸음 축지법을 쓰는 초침

대치맘* 구둣발소리 시계바늘 끌고 가네

 

*대치동 엄마를 일컫는 신조어

 

202126일 오전 1141

 

 

둥지

 

임채성

 

 

불빛보다 달빛이 밝은 산동네 언덕빼기

등은 살짝 굽었어도 늘 푸른 소나무에

신혼의 까치 한 쌍이 포르릉 날아들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새 날을 노래하며

뼘들이로 물어나른 삭정이와 지푸라기

굵다란 가지 안쪽에 둥지 하나 틀었다

 

솔 그늘에 해가 들자 돌풍이 일어났다

그악스레 달려드는 까마귀 일족 앞에

갓 낳은 알은 깨지고 바람벽도 무너졌다

 

까치울음 맴을 도는 재개발 정비구역

투구 쓴 철거반원 판잣집 울러멜 때

뉴타운 보금자리주택 분양이 시작된다

 

 

202126일 오후 1215분 토요일

 

 

날아라, 두루미

 

임채성

 

 

자판기 커피 뽑다 새 한 마리 다시 본다

우수리도 돌려받은 오백 원 주화 속에

양 날개 활짝 펼친 채 부조된 저 두루미

 

어디로 날고 싶었나, 좁은 목 길게 빼고

하릴없이 바라보는 납빛에 잠긴 하늘

몸값을 저당 잡혀도 이민의 꿈은 멀다

 

주물공장 뜨거운 꿀둑 지나온 황사비가

거품 문 개울 따라 몸 푸는 그날에도

갈맷빛 스러진 산엔 피가 돌고 있을까

 

소나무 참나무가 종이컵을 찍는 도시

뻥 뚫린 고목 가슴 콘크리트 땜질하듯

두루미 숨찬 울음이 쇳소리로 울린다

 

 

202126일 오후 1220분 토요일

 

 

사랑이 사랑에게

 

임채성

 

 

지하철 계단 아래로 쓸쓸히 몸을 숨기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본 적 있나

전동차 바퀴 소리가 쟁쟁 울던 그런 날

 

여름의 손을 놓자 차디찬 겨울이 왔네

승차를 거부하면 전원 끊은 스크린도어

터널은 너무 길었네

봄도 따라 연착이네

 

부은 목젖 안 뵈려고 시퍼렇게 뱉던 말들

헐거워진 늑골 사이 메아리로 울려올 때

어제는 허깨비던가,

어디에도

없네

너는

 

 

<2020 2회 정음시조문학상>

202126일 오후 1226분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