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220

<시조>비비추*에 관한 명상 /문무학

비비추*에 관한 명상 문무학 만약에 네가 풀이 아니고 새라면 네 가는 울음소리는 분명 비비추 비비추 그렇게 울고 말거나 비비추 비비추. 그러나 너는 울 수 없어서 울 수가 없어서 꽃대궁 길게 뽑아 연보라빛 종을 달고 비비추 그 소리로 한번 떨고 싶은 거다 비비추. 그래 네가 비비추 비비추 그렇게 떨면서 눈물나게 연한 보랏빛 그 종을 흔든다면 잊었던 얼굴 하나가 눈 비비며 다가선다. * 백합과 다년생의 산초. 7~8월에 개화하며 산지의 어둡고 습한 암벽, 너도밤나무 등의 고목 줄기에 착생함. ㅡ권갑하엮음『현대시조대표작』(알토란북스, 2018) 2021년 2월 14일 20분 26분 일요일

꽃의 본적 /홍일표

꽃의 본적 홍일표 꽃은 멀다 입술을 오므려 내 안의 너를 연주할 때 어느 미라의 눈꺼풀에 내려앉는 휘파람 같은 꽃 그림자는 붉지도 노랗지도 않아서 오래 잊고 있던 너였거나 너의 숨길이었거나 지금은 색을 버린 살 희미한 기억 한 줌 검은 숨을 쉬고 있다 검은 시간을 흐르고 있다 꽃이 벗어놓은 꽃 돌아가서 잠든 꽃의 미라 색이 다하여 까맣게 타버린 너는 잠자는 꽃이라 했지만 저것은 어두운 태중의 아이 후 불어도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꽃은 멀다 색색을 주장하지 않고 이름도 표정도 없이 바닥에 엎드려 피는 머나먼 당신 ―시집『중세를 적다』(민음사, 2021) 2021년 2월 13일 오후 12분 18분 금요일

<시조>과수밭의 詩 /임성구

과수밭의 詩 임성구 창원 북면 단감밭에서 시인의 감感을 딴다 빛깔 곱고 제일 큰 것에 먼저 손이 가는 것은 자연의 당도를 훔치고픈 간절한 열망이다 다디단 감의 감정을 독파한 새들이 콕콕 쪽 가을 문장 크게 한 입 베어 먹는다 좀처럼 오지 않던 은유 한 광주리로 와 있다 ―『오늘의시조』(2021년 제15호) 2021년 2월 12일 오전 11분 33분 금요일

<시조>사과나무 엿보기 /배종도(2021 제2회 모상철문학상 당선작)

사과나무 엿보기 배종도 1. 봄, 감탄사 물음표로 내민 고개 연분홍 송이마다 명지바람 쓰다듬어 이마 살짝 적셔놓는 이슬 밴 감탄사들이 자란자란 피어난다. 2. 여름, 사과 가장이 열매 많아 찢긴 가지 그 아픔 알고부터 성글게 맺힌 씨알 장맛비 맛서나 보고 태풍이 날을 세워도 몸짓 저리 의연하다. 3. 가을, 소슬바람 황금 햇빛 으깨 빚은 탐스러운 붉은 결실 먼 길 온 소슬바람 품에 안고 감싼 자리 그곳에 허공이 잠시 등 기대고 앉아있다. 4. 겨울, 소실점 곤 때 절어 떠나는 잎 소실점 향해 가고 팔매질 눈송이들 어깨를 두들릴 때 자, 보라! 옷 벗은 몸통 울근불근 저 근육을. 2021년 2월 9일 18분 57분 화요일

<시조>사막에서 ―페루 와카치나 /임만규(2020 제1회 모상철문학상 당선작)

사막에서 ―페루 와카치나 임만규 참으로 멀리 왔다 그래도 가야한다 눈앞에 황량하니 나도 곧 사막 되나 세상은 열려있어도 길 찾기는 어렵다 욕망은 신기루라 꿈처럼 뒤척이고 먼 길을 걸어가면 추억도 짐이 되나 가슴이 너무 기름져 발걸음이 무겁다. 여기서 실종되면 세상은 끝이 난다 마음을 열어야지 모래에 갇히려나 버리고 모두 버리고 가족 찾아 걷는다. 2021년 2월 9일 17분 55분 화요일

<시조>사랑과 이별에 대한 몇 가지 해석 /서숙희

사랑과 이별에 대한 몇 가지 해석 서숙희 사랑은 현금이고 이별은 외상이다 사랑은 총론이고 이별은 각론이다 사랑은 입체적이고 이별은 평면적이다 그 모든 것 한데 섞인 소용돌이가 사랑이다 그 모든 것 눌어붙은 지리멸렬이 이별이다 그 모든 사랑과 이별은 아, 낙화이며 유수다 ―계간『나래시조』(2019년 가을호) 2021년 2월 9일 14분 42분 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