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220

목멱산(木覓山)*그늘 /윤금초

목멱산(木覓山)*그늘 윤금초 * 붙잡아도 붙잡아도 가는 세월 꼭뒤 너머 울력 나온 낮달 그예 잡목 숲길 기웃댄다. 산울림 목 붉은 울음 풀다 말다, 풀다 말다…. ** 허천뱅이 산턱인가 출출한 해거름 녘에 걸귀 든 그늘 자락 숲정이를 붙잡다 놓고 귀 밝은 저 푸새들도 들숨날숨 숨 고른다 *** 시나브로 떨고 있다, 늙수그레 시든 뒷등 황동(黃銅) 물빛 뒤집어쓴 맨몸 시린 가지 사이 눈부신 갈잎 갈피가 시전지(詩箋紙)로 펄럭인다. *서울 남산의 다른 이름 ㅡ『공정한시인의사회』(2021, 3월호) 2021년 4월 24일 18시 06분 토요일

반구대 암각화 /심은섭

반구대 암각화 심은섭 여기는 제작연대 미상의 카페입니다 신분제도가 없어 회원이 꽤나 됩니다 월회비는 한 덩어리의 구름이고, 가입비는 한 접시 바람일 뿐, 누구나 ID가 ‘원시인’인것은 설립자의 유언으로 양해 바랍니다 절벽에 새겨진 호랑이가 암벽등반대회 참가 중이라는 ‘댓글’을 달지 마세요 이미 정신이 실종된 빈 가죽일 뿐입니다 방명록엔 누구든 가을빛 눈물 한 방울쯤 떨어뜨릴 수는 있어도, 암벽의 흰수염고래 가죽을 ‘복사’해서는 안됩니다 들소의 아마포 찢는 듯한 울음소리는 한 움쿰만 퍼가세요 눈을 감지 못한 물개가죽을 다른 곳으로 ‘붙여넣기’해서도 곤란합니다 바다거북이가 궁서체로 쓴 편지는 지금도 전송 중이므로 다른 이름으로 ‘저장’을 불허합니다 그 까닭은 그들의 영혼을 비는 주술사의 제의가 아직도 진행 ..

<동시>민들레 엄마의 당부 /백민주

민들레 엄마의 당부 백민주 나는 좋은 집 한 채 못 마련했지만 너희들은 좋은 집에 살아라. 아파트 옥상 갈라진 시멘트 틈 사이 그집에서도 너희들을 잘 키워냈지만 너희들은 친구도 없고 외로웠지? 엄마 걱정 말고 멀리 가서 많이 배워라. 양지 바른 풀밭에 좋은 집 마련하고 친구도 많이 사귀고 재미나게 살아라. ㅡ동시집『할머니가 바늘을 꺼내 들었다』(책내음, 2020) 2021년 4월 3일 16시 34분 토요일

문장들 /김명인

문장들 김명인 1 이 문장은 영원히 완성이 없는 인격이다 2 가을 바다에서 문장 한 줄 건져 돌아가겠다는 사내의 비원 후일담으로 들은들 누구에게 무슨 감동이랴, 옆 의자에 작은 손가방 하나 내려놓고 여객선 터미널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면 바다는 몇만 평 목장인데 그 풀밭 위로 구름 양 떼, 섬과 섬들 이어놓고 수평선 저쪽으로 몰려가고 있다 포구 가득 반짝이며 밀려오는 은파들 오만 가지 생각을 흩어놓고 어느새 석양이 노을 장삼 갈아입고 있다 법사는 문장을 구하려 서역까지 갔다는데 내 평생 그가 구해 온 관주(貫珠) 꿰어 보기나 할까 애저녁인데 어둠 경전처럼 밀물져 수평도 서역도 서둘러 경계 지웠으니 저 무한대 어스름에는 짐짓 글자가 심어지지 않는다 3 윤곽이 트이는 쪽만 시야라 할까, 비낀 섬 뿌리로 어느새..

봄의 생태학 /박기섭

봄의 생태학 박기섭 들매화 오는 길은 들매화에게 물어보고 산벚꽃 피는 듯은 산벚꽃에게 물어보리 이 봄이 거년 그 봄이면 되올 꽃이 없거늘 꽃샘 일은 꽃샘에도 피는 꽃에 물어보고 잎샘에도 피는 잎에 잎샘에게 물어보리 올 봄이 지난해 보채던 말더듬히 그 봄이면 어차피 가얄 길을 가는 봄은 가라더니 가고는 못 올 길을 가는 이는 가라더니 뻐꾸기 먹울음 울어도 남은 먹빛 있음에 ―『시조21』(2021년 봄호) 2021년 3월 19일 18시 09분 금요일

[동시] 평화상은 누가 /손동연(제11회 열린아동문학상 수상작)

평화상은 누가 손동연 노벨 평화상은 꽃들이 받아야 해요. 포탄이 떨어진 땅에서도 웃음을 피워올리잖아요. 노벨 평화상은 지렁이들이 받아야 해요. 포탄이 묻힌 땅속에서도 지구의 숨구멍을 뚫고 있잖아요. 노벨 평화상은 별들이 받아야 해요. 포탄이 날아다니는 하늘에서도 두 손을 모으게 만들잖아요. 사람들은요? 대포가 팡, 팡, 팡! 폭죽을 터뜨리거나 색색의 솜사탕을 뭉게구름처럼 퍼뜨릴 때 총이 흙을 향해 온갖 꽃씨들을 쏟아내는 그런 날이 오면, 온다면...... ―『열린아동문학 88호』(2021년 봄호) ― 2021년 3월 19일 13시 08분 금요일

<동시>평양 아줌마 /박소이

평양 아줌마 박소이 간판도 없는 작은 가게에서 생강 도넛과 평양냉면을 팔았는데 가끔 아저씨들이 냉면 내기 화투를 치기도 했어 지나가다 아버지 모습이 보이는 날이면 엄마가 집에 빨리 오시라고 했다며 시키지도 않는 거짓말을 했지 평양 아줌마가 귀엽다며 생강 도넛을 줘도 받아 먹지 않았어 고운 한복에 하얀 머릿수건을 쓰고 눈이 반달처럼 웃는 평양 아줌마 예뻤지만 싫었거든 ―『동시마중』(2019년 7-8월) 2021년 3월 16일 14시 04분 화요일

최기향 -눈 내리는 산사 ―부석사에서/저무는 강가에서(제11회 시조21 신인문학상)

눈 내리는 산사 ―부석사에서 최기향 포슬포슬 가루눈이 어루듯이 내린다 부처님도 큰스님도 출타중인 무량수전 돌이 된 선묘낭자의 결계結界만이 환하다 소리를 등에 지고 잠이 든 법고 곁에 안양루 늙은 목어 눈 뜨고도 꿈을 꾸나 하얗게 뼈를 드러낸 고요만이 자욱하다 시간의 우듬지에 숨어 우는 천년 바람 나 하나 다 비우고 너를 다시 채울 때 온 세상 돌아와 앉은 텅 빈 고요, 만난다 저무는 강가에서 최기향 내 안에 자맥질하는 물오리 첨벙첨벙 마을을 휘감으며 흐르는 강물을 보면 한순간 내 몸도 녹아 노을빛 물이 된다 모래톱에 터를 잡은 버드나무, 줄이 곱다 귀소를 서두르는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비워져 부신 하늘로 포물선을 긋는다 무거워진 서녘 멀리 달이 내려 꽃이 피면 어둠에 조아리는 물소리 풀벌레소리 바람도 ..

이예진 -자화상/억새(제11회 시조21 신인문학상)

자화상 이예진 거울 앞에 다가서면 또 하나의 얼굴 있다 속으로 울면서도 겉으로 웃는 표정 주말극 주인공보다 연기가 더 맵차다. 배운 적 없는 연기가 세상을 다 속였으니 차라리 광대였으면 울음에나 길이 들지 가상한 내 얼굴 위해 분을 다시 바른다. 겉과 속 뒤집어도 같은 향이 나길 바라며 하찮은 질문이며 대답도 내려놓고 어린 날 그림 일기 속 자화상을 만난다. 억새 이예진 화려한 날은 가고 버려진 산 어귀에 스스로 뼈를 훑는 쓰쓰싹싹, 깊은 결기 헤 저문 어깨동무에 바람마저 삼간다. 2021년 3월 15일 19시 24분 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