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220

<동시>엄마라는 이름이 가장 빛날 때 /조현미 (2021 제11회 천강문학상 아동문학부문 우수상)

엄마라는 이름이 가장 빛날 때 조현미 민지와 버스 타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창밖을 보던 민지가 ―엄마! 하고 소리쳤다 버스 안 사람들 눈이 민지 눈을 따라갈 때 세상 가장 따뜻한 금빛 미소 보았다 전동차에 탄 야쿠르트 아줌마가 환하게 웃고 계셨다 민지네 엄마였다 ㅡ『제11회천강문학상 수상작품집』(경남, 2021) 2021년 4월 30일 오전 9시 8분 금요일

<시>손등의 기원 /안이숲 (2021 제11회 천강문학상 시부문 대상)

손등의 기원 안이숲 손등에 여름 장마가 지나가는 중이다 여자의 손은 수영에 능숙하다 배영과 접영은 기본기, 가까운 해변은 하루에도 몇 번씩 다녀올 수 있다 결혼을 하면 여자의 손등은 바다가 된다 깊은 물을 조심해야 해, 바다에 익사하지 않으려면 가끔씩 뒤집기를 해야 한다 거품 치는 파도를 잘 타 주어야 한다 딸아이가 엄마 하고 부를 때 손등은 출발 준비를 마친다 손이 춤추는 일은 여자의 권리이자 의무이므로 손등에는 커다란 서핑보드가 들어와 살고 있다 손등은 파도에 끄떡 않는 갯바위 같다 우직한 여자의 오래된 손등에 검은 따개비가 핀다 바닷가 백사장에 누워 햇볕을 받으면 손등은 햇빛 가리개가 된다 누군가 기대기에 좋은 벽이 된 다 다섯 개의 문을 가진 유람선이 된다 자꾸만 기대고 싶은 손등을 풀면 마른 바..

<시조>손을 보다 /서희(2021 제11회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대상)

손을 보다 서 희 어린 날 우리에겐 정직한 언어였어 곤지곤지 잼잼, 하며 수화처럼 말을 했지 그러다 첫 손을 내밀어 걸음마도 배우고 그저 말없이도 손바닥에 느껴지는 피아노 건반 짚듯 너 스쳐간 언저리는 설익은 약속의 반복, 애틋한 구애였지 방금 깨진 유리잔에 손바닥을 베었다 깨진 모든 것은 당돌한 힘이 있어 때로는 금이간 마음 덧대기도 한다지 ㅡ『제11회천강문학상 수상작품집』(경남, 2021) 2021년 4월 29일 21시 24분 목요일

<시조>천국이 보인다 /서 희(2021 제11회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대상)

천국이 보인다 서 희 ‘김밥천국’ 붙여 놓은 회사 골목 분식집에 직장이 발걸음이 바빠지는 정오 무렵 월급이 감봉된 만큼 가벼워진 한끼 식사 메뉴판에 이것저것 음식들이 빼곡하다 수고하고 짐 진 자들 다 여기로 모였는데 김밥만 천국이라니? 오늘 점심, 김밥 한 줄 ㅡ『제11회천강문학상 수상작품집』(경남, 2021)

<시>푸른 옹기 /안이숲(2021 제11회 천강문학상 시부문 대상)

푸른 옹기 안이숲 옆구리 모두 유통기한 하나씩 흉터처럼 찍혀 있는데 나는 나의 유통기한을 기억해 본 적이 없다 할머니는 몇 대째 이어 내려오는 내 몸속의 물들이 씨간장이라고 명명해 주신 적도 있지만 씨가 무엇인지도 모를 어린 나이부터 서리를 맞는 일을 배웠다 가끔 내 몸을 씻겨 주기도 하는 소나기를 피부에 새겨 넣기도 하고 바람이 전해주는 먼 곳의 이야기를 쟁여 두어 차곡차곡 담아 시의 근원을 만든다 씨란 할머니의 그 웃대 할머니의 고함 소리, 어찌나 그 목청소리가 크신지 뒷집 개가 놀라 도망가면 한 달이 훌쩍 지나가고 한번씩 뚜껑을 열 때마다 간장 속은 세상 모두를 달이고도 남을 만큼 찰지가 짰다 꽃잎 하나 떨어지지 않는 날에는 우두커니 서 있는 일도 허기가 져서 무두질해 부드러워진 옹기 한 벌 걸쳐 ..

<동시>받짇고리 속 우리 가족 /조현미(2021 제11회 천강문학상 아동문학부문 우수상)

반짇고리 속 우리 가족 조현미 “그만해 네가 뭘알아!” 말머리 뚝 짜르는 형과 누난 가위다, 날 세운 심술 가위 질문도, 착한말까지 싹뚝싹둑 잘라낸다 엄마는 바늘이다 양심 콕콜 찌르는 까맣게 익은 약속, 일기장 속 거짓말들 모조리 기억하신다 식구들 생일처럼 형과 누나 말이 옳지 내 말 또한 맞다는 아빠 말씀 실없다, 나는 늘 뒷전이다 집 없는 길냥이처럼 울다 잠든 밤이면 조각조각 배인 말들 송송 뚫린 마음을 동그란 천 덧대어 촘촘 꿰매주시는 할머닌 늘 내 편이다 할머니가 참 좋다 ㅡ『제11회천강문학상 수상작품집』(경남, 2021) 2021년 4월 29일 오전 10시 27분 목요일

<동시>배추흰나비 /조현미(2021 제11회 천강문학상 아동문학부문 우수상)

배추흰나비 조현미 아기가 엄마를 잊지 않으려고 점 하나를 콕! 제 중심에 찍어 놓듯 배추흰나비도 날개에 엄마를 조금 남겨놓았어. 배춧잎을 갉아 먹고 연둣빛 똥을 누고 고치 집 속에서 일곱 밤을 잘 때도 배추는 벌레를 꼬옥, 안아 주었어. 나비가 날아오르자 배추밭이 덩달아 출렁거렸어. 배추도 비상을 꿈꿨던 거야 애벌레 노란 꿈이 고물고물 부풀수록 켜켜이 날개를 접었던 거야. 배춧잎에 숭숭 뚫린 구멍은 잇자국이 아니었어. 배추의 눈물 자욱이었어. 돌아오겠다는 배추흰나비의 푸른 약속이었어. ㅡ『제11회천강문학상 수상작품집』(경남, 2021) 2021년 4월 28일 18시 55분 수요일

<시조>지금 함박눈이 /서 희(2021 제11회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대상)

지금 함박눈이 서 희 상층권의 구름들이 대륙권을 장악하다 추위가 몰려오자 저희끼리 부딪쳤군, 조각난 몸뚱이끼리 다시 또 뭉치다니 63빌딩 겅중겅중 아파트를 뛰어내려 난분분 춤을 춘다 16층 유리창 밖 잊을 건 잊어두라고 허락하듯 쌓이다니 ㅡ『제11회천강문학상 수상작품집』(경남, 2021) 2021년 4월 28일 13시 53분 수요일

나비 정첩 /안이숲(2021 제11회 천강문학상 시부문 대상)

나비 정첩 안이숲 무릎에 나비 한 마리가 다소곳이 날개를 접고 있어요 놋쇠 장식으로 된 고운 나비로 태어나 제대로 한번 날아보지 못한 어머니의 봄이 여름을 건너뛰려 하고 있네요 종손이라는 이름에 걸린 가문 한 채 간수하느라 공중을 떠돌아 잔잔한 이곳에 뿌리를 내린 당신 방문이 열릴 때마다 낮은 발자국 소리에 묻은 녹슨 고백 소리 사뿐히 들려옵니다 솜털이 시작되는 고향에서 나비무늬 박힌 치마저고리 입고 의령장에 구경 가던, 팔랑거리는 속눈썹 사이로 가볍게 날아오르던 어머니의 원행遠行엔 연지곤지 찍은 꽃들마저 고개를 숙였던가요 얘야! 시집와서 빗장을 지키는 게 평생의 일이었단다, 느리게 접힌 쪽으로 아픈 고개를 쟁여둔 어머니 다음 생애는 날개를 달고 태어나지 마세요 몇 겹으로 박제된 풍장의 어머니 쇳가루 떨..

바다를 암각하다 /신필영(2020 제40회 가람시조문학상)

바다를 암각하다 신필영 고래가 돌아온다 파도를 앞세우고 돌 속에 잠들었던 신석기가 돌아온다 누군가 겉봉도 없이 전해주신 만지장서 청동빛 이두박근 푸른 작살 움켜잡고 우우 몰려드는 함성만은 묵음처리 바위에 우뚝한 고래, 환생으로 지나간다 누천년 지켜왔을 사내들의 격한 숨결 저만치 밀려 나간 수평을 끌고 온다 바다는 걸어논 무쇠솥 햇덩이가 익는다 2021년 4월 24일 19시 00분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