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220

<시조>늙은 가스렌지 /우정숙

늙은 가스렌지 우정숙 처음엔 파란 불꽃 그을름도 없었다 손끝 살짝 닿으면 찌지직 스파크 일고 두 눈빛 알전구처럼 총명하고 맑았다 어느새 미간의 주름 까맣게 새긴 저녁 옆구리 툭툭 치면 어제 일도 기억 못 해 또 하루 거꾸로 더듬다 되물어 다그친다 강도 높던 점화력도 스스로 기가 죽고 깜박깜박 멀어지는 충전의 시간 위로 무덤덤 말 수는 줄고 정물로나 앉았다 ―시조집『문득』(목언예원, 2021) 2021년 11월 05일 오전 9시 11분

<시조>두룸박, 드레박, 두레박 /이정재

두룸박, 드레박, 두레박 이정재 손사래 거두지 못하는 벽이 있다면 저마다 건너지 못하는 강을 만나면 우물가 찾아오시어 두드려요 두룸박* 장마진 여름날에 입씨름하다 지치면 마음속 우물가에 드레박*을 툭 던져 내면이 바닥 치는 소리 들어봐요 두 귀로 심금이 요동치고 눈물샘 흔들어야 두레박 의지하며 밑바닥에 닿아야 가슴 뻘 뚫리잖아요 속내 깊은 물맛에 * 두룸박 : 충북, 전북 방언. * 드레박 : 강원지역 방언. ―시조집『지구대 일기』(고요아침, 2021) 2021년 11월 05일 오전 8시 59분

<시조>코뚜레 들녘 /강문신

코뚜레 들녘 강문신 길은 얼떨결에 반환점 휘돌아갔어 뉘 모를 아쉬움만 저만치 나앉아서 꼴똘히 반생을 보네 술 사발 기울이네 FTA 나발 불지만 곧들을 농심은 없어 걷힐라면 도로 안개 겹겹 그 어질머리 들녘은 코뚜레 황소나 그저 묵묵 끌고 끄는 기를 싸도 겹던 날들 부릴 수도 없던 날들 돌아보면 아득도 해라 가슴 치는 그리움 여인아, 해동解冬의 들녘으로 우리는 함께 가자 ―시조집『해동의 들녘』(문학과사람, 2021) 2021년 11월 05일 오전 8시 47분

<시조>꽃무릇 별사(別辭) /전연희

꽃무릇 별사(別辭) 전연희 남겨둔 발자국을 그대 딛고 돌아오라 살풀이 긴 자락을 모둠발로 내린 자리 뜨거워 눈을 감으면 가슴속도 불길이다 눈물을 별빛의 씨 뿌리 속 젖는 온기 헝클린 길을 닦아 붉은 살점 뚝뚝 진다 스러져 뼈마저 녹아 빈 하늘이 고이도록 오가는 꽃잎끼리 받드는 소신공양 명치에 갇힌 돌이 이보다 가벼우리 한 무리 지는 꽃 앞에 맑게 우는 종소리 ㅡ『서정과 현실』(2021, 상반기호) 2021년 10월 26일 10시 26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