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220

눈사람 만들기 /조영란

눈사람 만들기 조영란 얼마나 마음을 단단히 뭉쳤는가가 이 작업의 묘미입니다. 움켜쥘 수 없는 손은 생략해도 무방합니다 발이 없어도 어디든 가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좀 더 풍성한 은유가 따라올 것입니다 모자를 머리 위에 올려놓아 보세요 햇볕의 사적인 감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코는 적당히 비뚫어지는 게 좋습니다 앞뒤 없이 한없이 둥글기만 한 것들에게 모서리가 생길 것입니다 맨땅을 뒹굴게 하고 싶겠지만 참아야만 합니다 흰 옷에 얼룩을 묻히는 것은 불안을 사랑하는 일 점점 얼어붙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니까요 웃을지 울지는 알아서 결정하세요 어차피 보여줄 것은 텅 빈 미래인 걸요 우리는 사라질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아닌 것의 완성을 소망하며 쓸데없이 한 시절을 바칩니다 보이나요? 미치도록 뜨거운 심장 때문에 전 생애가..

<시조>세렝게티를 꿈꾸며 /임채성

세렝게티를 꿈꾸며 임채성 동살 훤한 갓밝이엔 늘 발목이 저려온다 누릴수록 군내 나는 서너 평 울안의 자유 촘촘한 쇠창살 너머 울혈 같은 해가 뜬다 뼈 바른 살코기론 주린 배 채울 수 없어 도둑괭이 울음에도 등줄기 털 곧추 선다 열꽃 핀 심방에 울리는 마사이의 북소리 왁자하니 몰려드는 가납사니 눈빛마다 수풀 가녘 에둘러 선 하아에나 비린 살내 무젖어 시큰한 콧날, 한겻 한겻 숨이 차다 언제가 돌아가리, 사바나 그 펀더기로 노숙의 달빛 받으며 밤새껏 쏘다니다 엇나간 도시의 한때 적바림하듯 포효하리 ―시집『세렝게티를 꿈꾸며』(고요아침, 2011) 2021년 8월 7일 20시 58분

<시조>꽃의 화법 /박권숙

꽃의 화법 박권숙 꽃대가 밀어올린 외로운 등대처럼 허공에 심장부에 빛을 꽂는 봉오리는 꼭 다문 입술로 깨문 붉은 독백 한 마디 가슴에 북받치는 말은 다 꽃이 된다 만발한 감탄사들 방백으로 처리되면 송이째 활짝 터뜨린 홍소 끝에 괸 눈물 지는 꽃 후두부엔 폐가의 뒤란처럼 묵음화로 삭제된 소리의 핏방울들 난분분 다 못한 별사 씨앗으로 여문다 ㅡ계간『시조시학』(2020, 봄호) 2021년 7월 29 15시 51분

봄의 디스플레이 /강우현

봄의 디스플레이 강우현 마트 옆으로 트럭 한 대가 들어선다 잿빛 천막을 봄까지 말아 올리자 막 꽃을 피울 것 같은 푸른 단결이 가득하다 큰 분盆 작은 분 할 것 없이 화사하게 필 권리 깎이거나 잘리지 않을 권리를 보장 받은 으싸으싸 화분들의 노동조합, 가장 싱그럽게 가장 화려하게 구호가 앞줄에 걸려 있다 한 분씩 바닥에 내리자 각각의 포인트를 살려 포즈를 취한다 미소는 필수, 일단은 선택 가능한 쪽에 중심을 두어 햇살을 예각으로 조절하자 겨울의 그늘이 지워지고 약국에서 옹알이하는 철죽 한 분 지팡이 짚은 할머니가 배냇짓하는 한이비 한 분을 고른다 조합원들이 팔리자 웃음이 덤으로 핀다 ―월간『우리詩』(2021, 7월호 신작 소시집) 2021년 7월 15 16시 15분

잉어 재봉틀 /황종권

잉어 재봉틀 황종권 저 잉어가 물을 재봉하고 있다 목부터 자라 목부터 빛나는 잉어 비닐이 골무다 밤에도 천을 짜는 강은 등줄기에 물비늘 붙이고 다니는 잉어를 기다린다 처음 온 곳이 저녁빛 아득한 갈대뿌리인데 그 서늘한 날자를 기록하는 산란철 먹구름을 부르듯 잉어는 아가미에 빗소리를 키우고 있었다 수초와 바위와 모래톱이 가위질을 시작했다 산란이란 얼마나 날카로운 물소리를 가지고 있는가 물의 봉재선을 꾸역꾸역 박고 넘기는 일 사실 무늬 하나를 빚는 일 별자리와 별자리를 잇는 징검돌이 되는 일 아무도 잉어가 물의 재봉틀이라는 것은 모른다 아무도 잉어가 주둥이로 물의 실을 잦는지도 모른다 윤슬은 잉어의 첫울음, 초록을 쏟아내는 버드나무 곁에서 잉어는 만삭의 별자리가 되거나 마른 기침으로 배냇저고를 짓고 있는지도..

<동시>도마뱀 사냥 나가신다 /유희윤

도마뱀 사냥 나가신다 유희윤 촐싹촐싹 초르르 도마뱀이 사냥을 떠났어. 무기는 날랜 혀 하나! 옳거니, 저기 사자가 누워있구나! 살금살금 다가갔어. ―사자야 꼼짝마. ―꼼짝 말라고? ―그래, 꼼짝마. 사자는 꼼짝 안 했지. 눈도 깜짝 안 했지. 바로 요때다. 도마뱀이 팔짝 뛰어올라 사자 콧등에 무기를 날렸어. 잡았냐고? 잡았지. 사자 콧등에 앉은 파리를 낼름 낚아채 꿀꺽 삼켰지. ―동시집『도마뱀 사냥 나가신다』(상상, 2021) 2021년 6월 30일 14시 34분

겨울 선자령 /이서화

겨울 선자령 이서화 초겨울 한낮의 선자령 바람을 읽는다 나무들이 모두 바람을 따라가는 곳 빽빽한 바람 속에 몇 그루 발치쯤으로 서 있는 소나무 해마다 조금씩 움직이는지 올해는 유독 바다쪽으로 가깝다 기울어져 있는 것 같고 기대고 있는 것 같다 먼 곳을 어쩌자고 의지할까 툭하면 안개 숨거나 흐린 날씨에 숨는 동해 저 쌀쌀한 면면과 눈 맞았을까 대관령 옛길처럼 구불거리는 마음 들여놓고 험한 거리를 묵묵히 걸어가는 마음이 되었을까 언덕 넘어 북서편 자락으로 몰려간 눈은 바람의 무늬 고랭지 밭고랑마다 눈과 바람이 들어차 있다 모래알 같은 눈발이 매섭게 흐르는 것은 블리자드 같다 모두가 바람을 등지고 빠른 걸음이지만 빼곡한 바람을 분석하는 바람개비만 느릿하다 풍력발전기 기둥 아래 바람의 조리법을 아는 사람들이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