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220

<시>그리운 상어 /이은원

그리운 상어 이은원 어떤 소리는 먼 데서 굴러온다 멀리서 오는 것들은 쉬 눈에 띄지 않는다 소리의 바퀴는 날카롭고 건강한 이빨을 가졌지만 함부로 물지 않는다 희부연한 동체가 물끄러미 미끄러져가는 먼 훗날 바닷속 이야기 그것은 간격과 반격에 대한 사유 간격은 빛과 어둠을 만들고 너와 나를 만들고 깊은 물살을 만든다 꼬리를 만들고 지르러미를 만들고 차르르 차르르 데본기의 바다를 유영한다 우리는 붙잡히기 위해 달아나고 사라지기 위해 나타난다 부레가 없어 끊임없이 페달을 밟아야 하는 운명의 바퀴살은 한곳에 머무는 순간 사라져버릴 것이다 장렬히 끝내는 것만이 최선이었던 사랑이라는 형태가 주는 기기묘묘한 내용들 기억은 떼를 지어 다니는 습성이 있다 가을이 오면 붉은 나무는 붉은 눈물을 흘리고 모든 소리는 네게로 선..

<동시>소리의 맛 /김정신

소리의 맛 김정신 엄마 잔소리 쓴맛 동생만 예뻐하는 소리 떫은 맛 시험 못 봐서 혼내는 소리 매운 맛 엄마 아빠가 싸우는 소리 비린 맛 내가 우는 소리 짠 맛 맛없는 소리 맛보고 싶지 않는 소리 피자 아저씨 초인종 소리 단맛 할머니가 부르는 가락 감칠맛 엉짱 혜수가 넘어지는 소리 고소한 맛 내 짝 민재가 날 부르는 소리 달달한 맛 칭찬받는 소리 당기는 맛 맛있는 소리 매일매일 맛보고 싶은 소리 ㅡ『열두 살 사춘기』(열린어린이, 2017) 2021년 3월 6일 17시 34분 토요일

<동시>알아서 해 해가 떴습니다 /정연쳘

알아서 해가 떴습니다 정연철 해가 떴습니다 엄마 입에서 알아서 해가 떴습니다 엄마가 친구들과 약속 있어 급히 나가는 날 알아서 해는 세상에서 제일 신나는 해 엄마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날 알아서 해는 세상에서 제일 알쏭달쏭한 해 학교에서 말썽부린 날 학원에서 시험 망친 날 알아서 해는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해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해 ㅡ동시집『알아서 해가 떴습니다』(사계절, 2018) 2021년 3월 6일 15시 53분 토요일

<시>몰래 예뻤던 봄 /손순미

몰래 예뻤던 봄 손순미 문을 닫은지 오래인 카페 앞 자목자목 목련이 지고 있다 목련이 죽음의 향기를 내지른다 아무도 몰래 예뻤다가 색종이처럼 떨어져 내리는 목련,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나 여기 목련이 지고 있어, 누가 확성기 좀 빌려줘요! 나는 트럭을 얻어 타고 마을을 돌며 목련의 임종을 알려야 하리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나 목련은 저 혼자 예뻤다가 어두운 카페 유리창에 제 몸을 비춰본다 화려한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목련의 울음이 흑흑, 떨어져 내린다 화양연화의 시절이 간다 나무 절벽 아래 떨어져 내리는 것이 있다 치마가 거꾸로 뒤집힌 채 낙화하는 헝겊 인형의 추락사를 본다 목련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푯말을 내걸었던 한 장의 봄날이 저만치 간다 나는 아무도 없는 카페의 목련밭에 서서 허전한..

<동시>밤을 데려오자 /방주현

밤을 데려오자 방주현 별을 보고 싶은데 밤이 아니야 꿈을 꾸고 싶은데 아직 밤이 아니야 밤을 데려오자 달도 없이 별만 있는 깜깜한 밤을 데려오자 이불을 덮어쓰고 야광별을 꺼내자 별을 보다 질리면 눈을 감고 꿈을 꾸자 친구들을 불러 같이 놀다 지쳐서 다시는 놀고 싶지 않는 꿈을 꾸자 ―『창비어린이』(2021년 봄호) 2021년 3월 3일 18시 50분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