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뜨거운 술 /임성구 뜨거운 술 임성구 무덤가에 앉은 새가 엉엉 우는데 말입니다 봉분에 핀 할미꽃 주름펴며 웃지 않겠습니까 이 봄날, 새와 꽃이 나눈 술이 참, 뜨겁습니다 ―『시조춘추』(2012, 하반기호) ―시조집『형아』(고요아침, 2016) 2021년 3월 1일 오전 11시 18분 월요일 2021 다시 필사 시 2021.03.01
<시조>못 다한 이야기 /안영희 못 다한 이야기 안영희 하얗게 봄이 지는 벚꽃나무 아래 서서 가고픈 먼 고향의 네 얼굴 그리노니 아느냐 두고온 세월 깊어가는 그리움을 ―시조집『못 다한 이야기』(세종출판사, 2014) 2021년 3월 1일 오전 11시 04분 월요일 2021 다시 필사 시 2021.03.01
<시조>첨부 서류 /김삼환 (2018 중앙시조 대상작) 첨부 서류 김삼환 중요한 말은 묶어 별지로 첨부하니 조용할 때 열어보고 답신을 보내줘요 가을날 맑은 하늘에 뭉게구름 모습으로 가슴이 떨릴 때만 연락하라 하셨으니 어제 오늘 한꺼번에 여러 장을 썼어요 물들어 붉은 노을에 낙엽 몇 잎 떨구며 때로는 의미 없이 주고받던 말을 모아 첨부한 옛날 얘긴 열지 말고 기다려요 환절기 옷을 꺼내듯 파일명을 바꿀 테니 ―『시와 문화』(2017, 겨울호) ―시조집『그대의 낯선 언어를 물고 오는 비둘기 떼』(시산맥사, 2020) 2021 다시 필사 시 2021.02.27
<시조>산이 내게로 와서 /추창호 산이 내게로 와서 추창호 허리 휜 세상살이 잠시 접어 두고 웃자란 모난 생각 그도 슬쩍 밀쳐놓고 저 푸른 바람을 따라 산문에 들어선다 일가를 이룬 솔숲 그 품에도 안겨 보고 키 작은 금붓꽃 눈높이도 맞춰 가면 내 낡은 소매 끝에도 진초록 물이 든다 들숨 날숨 가빠지면 바위에 걸터앉아 들어보는 계곡의 무상 청정淸淨 설법 옹이진 마음자리도 봄눈 녹듯 녹아난다 산굽이 굽이마다 움켜쥔 것 내려놓으면 한결 간결해진 생의 문장 사이로 푸드덕 산새 한 마리 힘차게 날아오른다 ㅡ시조집『길은 추억이다』 한강, 2021) 2021년 2월 26일 14시 25분 금요일 2021 다시 필사 시 2021.02.26
<시조>빗방울에 대한 단상 /추창호 빗방울에 대한 단상 추창호 하늘에서 지상으로 먼 길을 떠나는 동안 결코 빗방울은 몸을 섞지 않는다 꼿꼿한 자존의 뼈댜 서고 꺾지 않는다 정점에 닿기까지 사력 다한 삶이지만 남의 경계 넘보거나 추월하지 않는다 한일자 세워 긋는 붓 제멋 또한 멋이므로 마침내 행장을 풀고 저문 날 앞에 서면 너와 나 헐린 경계 동심원 길인 것을 용서와 화해로 쓰는 일기 쓰는 강인 된다 ㅡ시조집『길은 추억이다』 한강, 2021) 2021년 2월 26일 14시 17분 금요일 2021 다시 필사 시 2021.02.26
<시조>왼바라기 /임채성 왼바라기 임채성 걸음 뗀 그날 이후 아버지는 말하셨지 연필과 숟가락은 꼭 오른손에 잡으라고 옳은 쪽 바른 손만이 법이고 밥이라며 날 때도 왼쪽부터 팔다리가 나왔던 난 외곬의 아버지 말씀 마냥 좇진 못했지 누르면 용수철처럼 튕겨지는 결기 앞에 그런 날 무람하게 교차로에 나서 보면 신호 없는 좌회전은 너나없이 불법인데 눈치껏 그냥돌아도 우회전은 뒤탈 없고 오른쪽 날개로만 날 수 있는 반쪽 나라 자오선 좌표 위에 묶여 있는 이 하루도 그른 쪽 그늘에 숨어 비익조比翼鳥를 꿈 꾸네 ―시조집『왼바라기』(황금알, 2018 2021년 2월 19일 오전 16분 24분 금요일 2021 다시 필사 시 2021.02.19
<시조>박진옥 -자전거 타기/봄날(제10회 시조21 신인문학상 당선작) 자전거 타기 박진옥 한 오라기 욕심도 발붙이지 못한 세상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의 뱃속으로 둥글게 몸을 웅크리고 폐달 연신 밟는다 가야산 계곡마다 새 봄빛이 쌓이는데 더께 앉은 세월만큼 이끼 낀 늙은 돌들 나직한 물소리마저 두 바퀴에 감긴다 봄날 박진옥 딸 부잣집 맏이로 살림 밑천이시던 어머니 내리 셋 아들들을 제 갈 길로 떠나보내고 이웃집 어여쁜 날들 몹시도 부러워하시더니 화장품 바구니 이고 골목골목 누비시고 마지막 품에 안은 인공관절 두 조각 귓가에 맴도는 말씀 ‘이게 내 운명이다’ 마른버짐 자리 잡듯 산벚꽃 피는 봄날 까마귀 울음소리에 어머님 잠을 깨시나 어딘가 귀 익은 목소리에 바람도 숨 죽인다 2021년 2월 18일 20시 19분 2021 다시 필사 시 2021.02.18
<시조>박서인 -강변 공원에서/누에에 관한 기억(제10회 시조21 신인문학상 당선작) 강변 공원에서 박서익 황악산 기를 받아 포도 알알 익힌 바람 농부의 땀방울을 가만가만 닦아주네 저문 놀 대나무 숲에 새들을 재울 때까지 직지천 맑은 물에 주저앉은 뭉개구름 물오리 자맥질에 하늘 잠시 출렁이고 바람은 바쁜 걸음으로 뒷걸음질 치고 있네 누에에 관한 기억 박서익 온종일 모를 심고 지쳐서 돌아온 저녁 희미한 호롱불 아래 비워내던 국수 한 사발 초여름 아픈 허리는 꿈길 속에 뉘었지 모과나무 잔가지에 별들도 잠든 시간 한잠 잔 누에들의 쉬지 않던 먹성이라니 소나기 마구 쏟아지고 먹물 같은 깊은 밤 수매장 검수원들 번쩍이는 매의 눈빛 길고 긴 보릿고개 허기로 속을 채우고 온 정성 다해 마련한 공납금을 쥐어던 날 2021년 2월 18일 19시 48분 2021 다시 필사 시 2021.02.18
[동시] 달팽이 전세 계약서 /송찬호 달팽이 전세 계약서 송찬호 달팽이 콩잎과 전세 계약을 했다 둥글넓적한 콩잎 마당에서 여름 동안 살다 가기로 했다 태풍이 불어 콩잎이 뒤집히거나 해서 콩잎에 붙어 있던 달팽이집이 땅에 똑, 떨어지면 그때 전세 계약이 끝나는 걸로 계약서에 서명 했다 ―『시와 동화』(2020, 가을호) 2021년 2월 18일 오전 8분 43분 목요일 2021 다시 필사 시 2021.02.18
서녘의, 책 /박기섭 서녘의, 책 박기섭 굳이 말하자면 나는 이미 낡은 책이다 그러니까 그 책 속의 내 시도 한물간 시다 귀 터진 책꽃이 한쪽에 낯익고도 낯선 책 날을 벼린다손 금세 또 날이 넘는, 은유의 칼 한 자루 면지에 박혀 있다 찢어진 책꺼풀 사이로 붉게 스는 좀의 길 그 활판 그 먹활자 향기는 다 사라지고 희미한 종이 재만 갈피에 푸석하다 터진 등 덧댄 풀 자국 바싹 마른 서녘의, 책 ㅡ시집『서녘의, 책』(발견, 2019) 2021 다시 필사 시 2021.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