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들
김명인
1
이 문장은 영원히 완성이 없는 인격이다
2
가을 바다에서 문장 한 줄 건져 돌아가겠다는
사내의 비원 후일담으로 들은들
누구에게 무슨 감동이랴, 옆 의자에
작은 손가방 하나 내려놓고
여객선 터미널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면 바다는
몇만 평 목장인데 그 풀밭 위로
구름 양 떼, 섬과 섬들 이어놓고
수평선 저쪽으로 몰려가고 있다
포구 가득 반짝이며 밀려오는 은파들
오만 가지 생각을 흩어놓고
어느새 석양이 노을 장삼 갈아입고 있다
법사는 문장을 구하려 서역까지 갔다는데
내 평생 그가 구해 온 관주(貫珠) 꿰어 보기나 할까
애저녁인데 어둠 경전처럼 밀물져
수평도 서역도 서둘러 경계 지웠으니 저 무한대
어스름에는 짐짓 글자가 심어지지 않는다
3
윤곽이 트이는 쪽만 시야라 할까, 비낀 섬 뿌리로
어느새 한두 등 켜드는 불빛
방파제 안쪽 해안 등의 흐릿한 파도 기슭에서
물고기 뛴다, 첨벙거리는 소리의 느낌표들!
순간이 어탁되다, 탁, 맥을 푼다
끝내 넘어설 수 없었던 상상 하나가
싱싱한 배태로 생기가 넘치더니 이내 삭아버린다
쓰지 않은 문장으로 충만하던 시절은 내게도 있었다
볼만했던 섬들보다 둘러보지 못한 섬
더 아름다워도
불러 세울 수 없는 구름 하늘 밖으로 흐르던 것을
두 개의 눈으로 일만 파문 응시하지만
문장은 그 모든 주름을 겹친 일 획이라고
한 줄에 걸려 끝끝내 넘어설 수 없었던 수평선이
밤바다에 가라앉고 있다
4
시원에 대한 확신으로 길 위에 서는
사람들은 어느 시절에나 있다
시야 저쪽 아득한 미답들이
문득 구걸로 떠돌므로 미지와 만난다는
믿음으로 그들은 행복하리라
타고 넘은 물이랑보다 다가오는 파도가 더 생생한 것
그러나 길어 올린 하루를 걸쳐 놓기 위해
바다는 쓰고 지운다, 요동치는 너울이고 고쳐 적지만
부풀거나 꺼져들어도 언제나 그 수평선이다
5
일생 동안 애인의 발자국을 그러모았으나
소매 한 번 움켜잡지 못해 울며 주저앉았다는 사내
그의 눈물로 문장 바다가 수위를 높였겠는가
끝내 열지 못한 문 앞에서 통곡한
사내에게도 맹목은, 한때의 동냥 그릇이었을까?
문장은, 막막한 가슴을 받아안지만
때로 저를 지운 심금 위에 얹힌다
늙지 않는 그리움 안고 산다면
언젠가는 수태를 고지받는 아침이 올까?
6
어둠 속에 페리가 닿고 막배로 건너온
자동차 몇 대, 헤드라이트를 켜자 번지는 불빛 속으로
승객들이 흩어진다, 언제 내렸는지
허름한 잠바에 밀짚모자, 헝겊 배낭을 맨 사내 하나
어두운 골목길로 사라진다
혹, 문장을 구해 서역에서 돌아온 법사가 아닐까
그가 바로 문장이라면?
허전한 골목은 닫혔다, 바다 저쪽에서
또 다른 사내들이 헤맨다 한들
아득한 섬 찾아내기나 할까?
일생 처녀인 문장 하나 들쳐 업으려고
한 사내의 볼품없는 그물은 펼쳐지겠지만
어느새 너덜너덜해진 그물코들!
나는 이제 사라진 것들의 행방에 대해 묻지 않는다
원래 없었으므로 하고많은 문장들
아직도 태어나지 않은 단 하나의 문장!
구름에 적어 하늘에 걸어 둔 그리움 다시 내린다
수많은 아침들이 피워 올린 그날 치의 신기루 가라앉고
어느새 캄캄한 밤이 새까만 염소 떼를 몰고 사라진다
그 염소, 별들 뜯어 먹여 기르지만
애초부터 나는 목동좌에 오를 수 없는 사내였다
―계간『세계의 문학』(2010, 여름호)
―시집『여행자 나무』(문학과지성사, 2013)
―(2011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 시 賞 수상)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1 올해의 좋은시 100選』(아인북스, 2011)
2021년 3월 25일 16시 06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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