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220

<시조>오동꽃을 보며 /박기섭(2014 제34회 가람시조문학상 수상작)

오동꽃을 보며 박기섭 이승의 더딘 봄을 초록에 멱감으며 오마지 않는 이를 기다려 본 이는 알지 나 예서 오동꽃까지는 나절가웃 길임을 윗녘 윗절 파일등은 하마 다 내렸는데 햇전구 갈아끼워 불 켜든 저 오동꽃 빗장도 아니 지른 채 재넘이길 열어났네 하현의 낮달로나 나 여기 떠 있거니 오동꽃 이운 날은 먼데 산 뻐꾸기도 헤식은 숭늉 그릇에 피를 쏟듯 울던 것을 ㅡ시조집『오동꽃을 보며』(황금알, 2020) 2021년 2월 3일 19시 58분

<시조>목도장 파는 골목 /박성민(2013 제5회 가람시조문학신인상 수상작)

목도장 파는 골목 박성민 노인의 손끝에서 이름들이 피어난다 이름 밖 나뭇결이 깎여나는 목도장 움푹 팬 골목길 안도 제 몸 깎고 피어난다 캄캄한 음각 안에 웅크려 있는 고독 나 아닌 것들이 밀칼에 밀려날 때 촘촘한 먼지 속에서 울고 있는 내 이름 노인의 이마에서 전깃줄이 흔들리고 골목에 훅, 입김 불자 길들도 흩어진다 도장에 인주를 묻혀 붉은 해 찍는 저녁 ㅡ시집 『어쩌자고 그대는 먼 곳에 떠 있는가』(시인동네, 2020) 2021년 2월 3일 19시 35분

<시조>알 /이지엽(2012 제32회 가람시조문학상 수상작)

알 이지엽 물방울 한 끝이 둥굴게 팽창하다가 여릿여릿 한 쪽으로 고개를 내민다 움켜진 주먹 속 눈물 눈시울이 붉어진다 풀면 죄다 죄(罪)가 될 말, 이리 많았던 게야 모두 쏟아내고 기꺼이 죽는 연어처럼 장엄한 다비의 말씀들 검은 씨앗의 별이 뜨고 으밀아밀 와이퍼 하나 쓰윽 지나가고 애써 끌고온 길이 일시에 지워진다 햇살에 비치는 차창 하얗게 빈 목구멍 그늘 호밀밭 휘파람처럼 작고 둥근 소리들이 깨끗하게 지워진 자리, 너를 다시 품고 싶다 순결한 가난의 기도가 겨울 문 앞 맑아지도록 2021년 2월 3일 17시 02분

<시조>숲에 들어 /김선화(2011 제3회 가람시조문학신인상 수상작)

숲에 들어 김선화 함박눈 미사포를 쓴 나무에게 배웠네 하늘 향해 손 모아 기도하는 마음을 안으로 아픈 기억을 다스리고 있음을 사나운 비바람에 꺾이며 떨던 시간 인고를 새기던 기나긴 발자국이 옹이진 상처였음이 눈으로 만져지네 화장을 지우고 엉킨 마음 나도 비우니 하늘에 기대어 빚지며 살아온 나날 꽃망울 세우는 핏줄 아프도록 보이네 2021년 2월 3일 13시 39분

<시조>무너지는 우상 /김연동(2011 제31회 가람시조문학상 수상작)

무너지는 우상 김연동 날선 시선들로 교전하는 거리 위에 짓밟혀 피 흘리는 일 일그러진 우리 우상 누리고 다지던 자리 무너지고 있나니, 댓잎처럼 푸른빛을 꿈꾸던 시간에도 진창의 풀잎 위에 찬바람 일으키고 그늘 속 시린 손마저 매섭게 뿌리쳤네 돌아보면 그리운 길, 그 푸르던 전설까지 이 시대 불문율로 몰아가는 벼랑 끝에 한 발짝 물러설 곳도 앉을 곳도 이제 없네 2021년 2월 3일 오후 12시 59분

<시조>연탄꼬리 지느러미 /손창완(중앙일보 시조백일장 2020년 11월 장원 수상작)

연탄꼬리 지느러미 손창완 해파리에 쏘인 듯 파르르 떨고 있는 난생처음 배달봉사 연탄을 드는 날은 앞서간 언덕구비가 서둘러 길을 냈다 뒤꿈치 들고 뛰며 오르내린 힘겨움이 방석없는 땅바닥에 철푸덕 앉았는데 할머니 석달치 분량 주름이 지워진다 껌정 묻은 옷을 털고 언덕을 구부리고 연탄 한 장 미끼 끼워 아궁이에 던진다 갓 잡아 올린 불꽃이 푸드대는 일요일 2021년 2월 2일 14시 02분

<시조>튜브 배꼽 /이미순(중앙일보 시조백일장 2020년 9월 장원 수상작)

튜브 배꼽 이미순 언제나 나는 나를 이겨내지 못한다 바람 든 여자같이 바람 난 여자같이 옆구리 빵빵한 뱃살이 튜브라면 좋겠다 오늘 아침 식단은 차라리 풀밭이다 군고구마, 단호박, 돌미나리, 가지나물 가끔은 공기밥 절반, 요거트는 간식이다 체중계 올라서면 눈썹마저 뽑고 싶다 백로나 왜가리처럼 한쪽 발도 들어보고 수류탄 안전 핀 뽑듯 튜브 배꼽 빼고 싶다 2021년 2월 2일 13시 03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