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220

<시>공터의 풍경 /오정순(제10회 천강문학상 우수상 )

공터의 풍경 오정순 공터에 내리는 비는 구겨진 절기의 줄기가 느릿합니다 버려진 액자가 있고 시는 난蘭 한 포기가 비에 젖고 있습니다 일직의 빗줄기가 지나가고 뿌리를 잡고 있는 바위에 푸른 이끼라도 살아 날듯합니다 깨어진 유리에는 깨어진 햇볕 어울리겠지요 반짝, 비가 갠 공복의 허공엔 햇볕이 따뜻합니다 소슬하게 바람이라도 불었는지 흔들린 난蘭 주변에 먹물이 번져 있습니다 골목을 막 들어선 봄의 등 뒤로 아지랑이 배접이 구불구불하고 몇 년 아니, 몇 십 년 쯤 피어있었을 꽃대가 피곤해 보입니다 붉은 노을이라도 세 들어 있는지 낙관엔 오래 흔들린 악력握力이 흐릿합니다 낡은 시선만 가득한 풍경, 떠나 온 벽의 경사가 누워 있습니다 어쩌면 저 풍경의 크기만 한 흰 공터를 벽에 남겨놓았을지도 모르지요 상실의 흔적들..

<시>박스를 접다 /송현숙(2020년 전라매일 신춘문예 당선작)

박스를 접다(2020년 전라매일 신춘문예 당선작) 송현숙 빈 박스를 접다 보면 오래된 주소가 비어 있거나 찢어져 있다 슬쩍 돌아가거나 뒤돌아섰던 지번들 한 개의 각이 접힐 때면 몇 해의 계절이 네 모퉁이를 거쳐 돌아온다 박스를 접다 보면 면과 면이 만나고 절벽이 생기고 작별하는 순간이 온다 박스를 접다 보면 나는 세상의 문을 하나씩 닫고 있다 검은 벽을 타고 가는 떠난 사람의 뒷모습처럼 우리는 서로 부딪치지 않는다 박스를 풀다 보면 지나가는 하루를 버스 손잡이에 보름달을 걸어두고 입석으로 지나가는 달의 노선을 돌면 동쪽과 서쪽이 포개지는 주소 없는 저녁까지 도망 와있다 한 사람이 박스를 열고 나간 뒤 오래된 박스만 남아 있다 네 개의 각도가 이웃처럼 쓸쓸히 바라보고 있다 2020년 전라매일 신춘문예 당선..

<시조>부여 /황바울(2021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부여 황바울 유적 같은 도시에서 유서 같은 시를 쓴다 아버지와 어색하다 식탁이 너무 넓다 갈증이 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물을 따랐다 날개 뜯긴 잠자리처럼 눈알만 굴려대다 발소리 죽이며 잠자리를 빠져나온 밤 유유히 강이 흘렀다 삼천명이 빠졌는데도 사계절이 가을인 이곳에서는 모두 안다 찬란은 잊혀지고 환란은 지워진다 오늘은 얘기해야지 밥을 꼭꼭 씹었다 *백마강변 낙화암에서 삼천명의 궁녀가 뛰어내렸다는 전설이 있다 [2021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2021년 1월 9일 14시 56분 / 토요일

<시조>벗고싶은 봄 /조규하(2021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벗고싶은 봄 조규하 코로나 바이러스 마스크 5부제가 담쟁이 넝쿨처럼 담벽을 둘러쳐도 빈손을 탈탈 털면서 제 집으로 가는 봄 내 맘이 네 맘이니 맘 편히 가지란다 더불어 같이 갈까, 미래를 통합할까 정의를 공화하려는 선거판에 열띤 봄 한 끼 밥은 건너가도 맨입으론 못 나가요 거리마다 입을 막고 거리를 두는 사이 우리는 서로 몰라요 각자가 따로지요 요일마다 수량 한정 봄날도 매진인데 선착순 이라는 말 불안하기 짝이 없어 언제쯤 입을 벗나요, 입술도 맞출까요 [2021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2021년 1월 8일 금요일 16시 05분

<시조>폐교 /김규학(2021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폐교 김규학 한때, 천 명도 넘던 전교생들 사라지고 그 많던 선생님들 뿔뿔이 흩어지고 궂은일 도맡아 하던 순이 아버지도 가버렸다. 모두 다 떠나버려 적막하고 스산한데 집 나간 아들 기다리는 어머니 심정으로 검버섯 창궐한 학교만 그 자리에 붙박여 있다. 나팔꽃이 휘청대며 국기 봉을 부여잡고 그늘만 넓혀가던 플라타너스 나무도 밤사이 떠나버릴까 까치둥지가 짓누른다. 좀이 쑤신 학교도 툭툭 털고 일어나 하루빨리 이 산골을 벗어나고 싶겠지만 날마다 담쟁이덩굴이 친친 주저앉힌다. [2021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2021년 1월 8일 금요일 15시 55분

<시조>플라멩코 /최정희(2021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플라멩코 최정희 스페인으로 떠날 거예요 플라멩코를 배우려고요 내 핏속의 역마살 자유를 꿈꾸어요 붉은빛 보헤미안의 꿈 우린 모두 집시였죠 영원한 안식이란 오직 죽음뿐인걸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오늘 그리고 내일 인생은 끝없는 여정 길 위의 삶이에요 희노와 애락들, 모든 것이 행복이듯 하루의 끝 석양이 아름다운 이유이죠 고독한 영혼의 언어 플라멩코를 춰 볼까요 [2021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2021년 1월 8일 금요일 15시 45분

<시조>금속성 이빨 /김남미(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금속성 이빨 김남미 허기 들린 포크레인 산동네를 잠식한다 비탈에 선 집과 가게 밥 푸듯 퍼 올려 뼈마디 오도독 씹는 공룡 같은 몸짓으로 찢겨져 너덜대는 현수막 속 해진 말들 무너진 담벼락은 철근마저 무디게 휘어 날이 선 금속성 이빨 하릴없이 보고 있다 이주민 행렬따라 먼지구름 피는 도시 아파트 뼈대들이 죽순처럼 솟아오를 때 만삭의 레미콘트럭 양수 발칵 쏟아낸다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2021년 1월 8일 금요일 15시 45분

<시조>다시 슬도에 와서 /설경미(2021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다시 슬도에 와서 설경미 얼마나 그리워야 소리로 젖어들까 떠나보낸 이름조차 이마를 두드리는 곰보섬 뚫린 바위섬 해무가 휘감긴다 아기 업은 돌고래 암각화 뛰쳐나와 바다와 맞닿은 곳 제 그림자 세우며 물살로 솟구치는 몸 허공을 겨냥한다 바다로 가는 길이 다시 사는 일이어서 견디며 삼킨 울음 앙금으로 남은 말 한겹씩 걷어낸 난간 간간이 말려놓고 구멍 난 살점마다 촘촘히 홈 메우듯 그제야 돌아앉아 거문고를 타는 섬 얼마나 그리워해야 소리로 젖어들까 [2021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2021년 1월 8일 금요일 15시 20분

<시>집들의 감정 /마경덕

집들의 감정 마경덕 이제 아파트도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푸르지오, 미소지움, 백년가약, 이 편한 세상… 집들은 감정을 결정하고 입주자를 부른다 생각이 많은 아파트는 난해한 감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타워팰리스, 롯데캐슬베네치아, 미켈란, 쉐르빌, 아크로타워… 집들은 생각을 이마에 써 붙이고 오가며 읽게 한다 누군가 그 감정에 빠져 입주를 결심했다면 그 감정의 절반은 집의 감정인 것 문제는 집과 사람의 감정이 어긋날 때 발생한다 백년가약을 믿은 부부가 어느 날 갈라서면 순식간에, 편한 세상은 불편한 세상으로 미소는 미움으로, 푸르지오는 흐리지오로 감정을 정리한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진달래, 개나리, 목련, 무궁화 아파트는 제 이름만큼 꽃을 심었는가 집들이 감정을 정할 때 사..

<시>외출학개론 / 마경덕

외출학개론 마경덕 먼저 기분을 고르고 외출의 크기를 고른다 구두와 가방과 의상은 분위기와 장소, 대상에 따라 크게 부풀려지거나 축소된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핸드백에 담아들고 나가는 여성들 명품을 선호하는 패션은 대부분 전자에 속한다 외출을 결정하는 것은 대부분 지갑이다 구두굽의 높이와 지갑의 크기를 계산하지 못한 외출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대로에서 넘어지는 것과 같은 것 더러는 감정을 포기하고 TV 앞으로 다가가지만, 그곳에는 백화점보다 더 노련한 쇼핑호스트가 신상품의 감정을 섞어 외출을 팔고 있다 유행에 예민한 여성들은 끼니를 거를지언정 외출을 거르지 않는다 수십 개의 넥타이를 두고 또 넥타이를 고르는 남자들처럼 외출을 고르는 것은 그날의 기분을 고르는 것 자주 끼니를 놓친 여자들은 안색이 창백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