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시조>변현상 ―뭐든지 다 합니다 /건망증을 또 까먹다/치매 벽동 ―목욕을 시켜드리며(2019년 천강문학상 당선작)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19.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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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다 합니다 /변현상

 

1.

정년퇴직 박갑수 씨 단독주택 대문에도

비 젖은 고지서가 연체로 꽂히면서

파도가 들이닥쳤다 침몰하는 어선 한 척

 

2.

콧물감기 훌쩍이는 어둑새벽 입동 무렵

골목 어귀 녹슨 트럭 어깨 높은 인력 시장

대처분

부도난 제품

벽보가 또 붙었다

 

3,

전무이사 상무이사

다 지나간 명함일 뿐

구명조끼 입을 채로 구명탄은 쏘아야지

일용직

가능합니다

뭐든지 시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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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을 또 까먹다

 

 

파일이 또 삭제됐다 로그인하다 끊긴 폴더

달빛 지운 까만 밤이 전두엽에 스며들면

대뇌의 모든 전원이 통째로 정전된다

 

입김 어린 차창 위에 손가락으로 쓴 계약서

한눈팔다 엔터키 친 바이러스 먹은 PC

감염된 파일이 된 양 살아날 줄 모르네

 

공짜 같아 막 눌렀던 무제한 테이터처럼

게워내지 못하는 할인 기간 넘긴 요금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억울한 건 할 수 없다

 

고장이 난 사람은 사람이 고치니깐

열고, 닫고 껐다, 켠다, 도대채 알 수 없다

그런데 밥은 먹었나? 발걸음을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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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벽동

―목욕을 시켜드리며

 

장미향 가득하던 오월이 어제인데

움켜쥐면 부서지는 당신은 매미 허물

오늘은 어쩐 일인지 해종일 맑습니다

 

아득히 손 흔들 날 소식 없이 오겠지만

꽃 피고 꽃 지는 게 당신의 뜻인가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이젠 벗고 씻어야죠

 

땀 훔치던 어미의 길 차마 정녕 잊겠어요

철없는 삼남 이녀 물리고 업고 안고

아직도 그때의 일을 어화둥둥 떠가는

 

 

<2019년 천강문학상 당선작>

 

2021년 1월 3일 오전 10시 1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