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텅 빌 때까지, 장미
조선의
돌과 바람과 직립의 돌담과 햇빛
그 환한 속 향기까지 삼켜내는 마음
이 모든 것들의 안간힘이
허공에서 출렁거린다
색에서 색을 빼거나 더해서
눈물 한 솥 끓여내듯 절정의 아름다움이
처음 간망했던 기도와 같을 때
애끓는 사람의 가슴속에서도 장미꽃은 핀다
밤과 낮을 무시로 건너기 위해
가시에 찔려 생인손 앓을 때
사랑과 이별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가시에 박힌 상처의 깊이만큼이나
세상일에 숨이 턱턱 막혔다
생애 굽이친 무수한 비명처럼
발꿈치 닿는 곳마다 빈 마음을 들키고 말았다
휘어지는 가지 끝에 매달렸지만
누구보다도 먼저
당신 가슴에 닿기를 원했다
까닭모를 외로움에 한껏 발을 세우고
화르르 불이 붙는 곳
아주 텅 빌 때까지 내어지는 한 생애
눈으로 보거나
코로 맡거나 귀로 듣는 향기가 지천인 오월
퍼내도 퍼내도 흘러나오는 붉음에
소리 나지 없는 아우성이 들끓으면
자주 명치끝이 아프고
앞이 캄캄하도록 눈이 부셨다
ㅡ낭송시집『꽃으로 오는 소리』(시꽃피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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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몇 년 전,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다. 부러진 다리를 수술하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재활치료가 시작되자 병원생활이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창밖을 내다보면 북한산 능선이 보이는데 일요일 쉬는 날이면 쏘다니던 산이 그립고 또 산을 다시 다닐 수 있을까 염려가 되기도 했었다.
지루한 병원생활이 이어지자 책을 보기 시작했다. 평소에 보고 싶은 책이 많았다. 최명희 혼불도 보고 싶었고 TV 연속극으로 보았던 박경리의 토지도 보고 싶었다. 우선 먼저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보고 한강, 아리랑도 보자 생각을 하면서 태백산맥부터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웬걸 태백산맥을 보고 나니 젊은 날 밤새도록 봐도 눈도 아프지 않던 눈이 침침하고 무엇보다 체력의 한계가 오고 있었다.
해서 소설은 접고 시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집을 하루에 3권을 사서 봐도 시간이 남아돌았다. 입원해 있던 당시 마침 현대 시 100년 되던 해라 조선일보에서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100 편을 연재하고 있었다. 지인에게 부탁해서 다 프린트를 해서 보았고 이것 저것 손에 잡히는 대로 닥치는 대로 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때 사 본 시집 중에 김윤현 시인의 <들꽃을 엿듣다> 시집도 있었다. 이 시집을 사 본 것은 이 시집 전체가 꽃을 소재로 하고 있어서인데 다른 시인들을 꽃 시를 어떻게 쓸까 궁금했었다. 산을 다니면서 꽃 사진을 찍으면서 꽃에 대한 시를 쓰다보나 남들이 쓰는 꽃 시를 보고 싶었다. 그 후 병원을 나와 인터넷을 찾아보니 꽃으로만 시집을 시리즈로 낸 시인도 있었고 또 많은 시인들이 같은 꽃을 다르게 시를 쓰고 있었다.
올 초 조선의 시인께서 “꽃 향기의 밀서” 꽃 시집 한 권을 보내주셨다. 그런데 얼마 전에 또 한 권의 시집 “꽃으로 오는 소리” 이 왔다. 이 시집 역시 전부 꽃으로 엮은 낭송시집이다. 조선의 시인은 꽃에 대해 무척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전 편에 이어진 시들을 살펴보다 짧은 시들은 없다. 대부분 한쪽을 넘어간다. 호흡이 긴 시를 쓴다는 것은 시인의 역량이기도 하다.
장미를 쓴 시인은 많다. 인류 영원의 주제라는 사랑 고향만큼이 많은 시인들이 즐겨 썼을 것이다. 장미 하면 먼저 생각나는 시인을 릴케일 것이다. 여자 친구를 위해 장미꽃을 꺾다가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죽었다고 하는데 장미를 사랑하는 시인에게 어울리는 죽음이기도 하다. 조선의 시인이 쓴 장미 시 또한 장미꽃처럼 매혹적인 향기로 다가온다. 장미에 대해 더 말해 무엇 하랴. 장미는 색이 바래도 장미이고 꽃이 져도 장미는 그냥 장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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