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나무 꽃
나병춘
대추나무는
게으르기 짝이 없다
봄에는 가장 늦게
새 연두 잎사귈 피운다
쬐끄만 꽃들은
보일락 말락
향기도
풍길락 말락
하지만 추석 무렵에 보면
태풍 장마도 이긴 싱싱한 열매들
태양의 힘을 뽐내듯
제법 토실 토실하다
작은 꼬추가 맵다더니
호동그란 대추 알맹이 속에
해와 달, 무수한 별들이
반짝반짝 숨쉬고 있다
―시화집『꽃』(한국시인협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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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마니아도 아니면서 산에 가면 꽃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꽃이 이쁘기도 하거니와 그보다 꽃 이름이 궁금하였던 것이다. 산골에서 태어나서 수많을 들꽃을 보고 자랐지만 꽃이 크고 화려한 꽃에만 눈길을 주었지 작은 풀꽃들은 발에 밟히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쩌다가 도시에 살게 되면서 등산을 하게 되면서 시를 알게 되면서 도시 골목 보도블럭에도 열심히 생을 밀어 올리는 풀꽃들을 눈여겨보게 되었던 것이다.
등산 초보는 어느 산을 가든 그 산의 정상을 밟아야 하는데 정상까지 향하는 길이 남들보다 두 배나 더 걸렸다. 지방의 작은 산은 그나마 낫다. 북한산처럼 큰 산은 봉우리만 해도 얼마나 많은가. 거기다가 백운대 정상으로 가는 길은 많기도 하다. 강북구 우이동에서 시작하는 코스도 직진하는 도선사 코스, 왼쪽으로 진달래 능선을 따라 대동문, 동장대 백운대 코스, 오른쪽 우이령 둘레길을 가다 왼쪽으로 올라가는 육모정 영봉 거쳐 올라가는 코스도 있다.
서울특별시 강북구·도봉구·성북구·은평구·종로구와 경기도 고양시·양주시·의정부에 걸쳐 있는 북한산은 그 크기도 어마어마하지만 정상으로 가는 길이 멀고 험하고 쉽고 가까움의 차이뿐 어느 지역에서 올라도 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여기서 수많은 북한산 코스들을 다 열거할 수 없지만 나는 이 수많은 북한산의 코스를 다 올라보았다. 그것도 봉우리와 풍경과 나무와 꽃을 찍으면 올랐는데 등산을 한 번 갔다 오면 카메라에 사진이 적게는 3백장에서 5백장이 찍혀 있었다.
산의 봉우리나 풍경에다 꽃 사진까지 찍으려니까 아침 새벽에 나서도 저녁 어스름이 되어야 하산을 했던 것이다. 산에, 들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봄에는 특히 산행 시간이 많이 걸렸다. 등산 재미 중 하나는 하산 후 사람들과 어울려 밥 먹고 한 잔하고 2차로 노래방이나 당구장으로 가는데 나는 술도 안 좋아하는 데다 잡기까지 능하지 못해 그저 사진이나 찍고 꽃 이름 알아가는데 재미를 들이고 있었다. 한때는 가는 산마다 지역별 등산 코스와 꽃 사진들을 종류별로 정리하느라 산을 내려와서도 밤늦게까지 컴 앞에 앉아 있는 날이 많았다.
시 제목 대추나무 꽃을 보다가 문득 꽃 사진을 찍으러 다니던 기억이 떠올랐는데 대추나무꽃도 이때 처음 보았다. 그저 익어가는 대추를 나무에서 따 먹을 줄로나 알았지 대추꽃이 있는 줄도 몰랐다. 장석주의 ‘대추 한 알‘ 시에서처럼 대추 알이 여물기까지 자연의 위대한 힘을 느끼지는 못했다 해도 꽃이 피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꽃이 있다는 생각도 못해 봤는데 그 작디작고 색깔도 잎과 비슷한 연둣빛 자잘한 꽃을 보았던 것이다. 잎도 크지 않은데 잎에 비해 워낙 꽃이 작다보니까 눈에 잘 띄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대추나무 잎이 새봄에 다른 나뭇잎보다 늦게 나왔던가. 같은 나무 가지에서도 먼저 나오는 잎이 있고 나중에 나오는 잎이 있는데 꽃나무들도 어떤 전략 때문인지 몰라도 각기 다르게 새잎을 여는 꽃나무를 본 적이 있었다. 기억에는 무궁화, 능소화가 봄에 새잎을 다른 나무들에 비해 늦게 피웠다. 능소화는 참나무 잎이 아기손만하게 자라도록 잎을 틔우지 않아 겨울에 동사했나 수명이 다돼 죽었나 생각되어질 그때 뾰족이 새순을 내밀었던 것이다.
시에서처럼 대추나무꽃은 볼품없고 향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열매만큼은 그 누구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맛도 모양도 때깔도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으니 꽃이 화려해도 별 쓸모없는 열매를 맺는 장미꽃에 비하랴. 이제 보름 정도 지나면 추석인데 그 추석에 입안을 궁굴리는 단맛을 보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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