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대상포진
박숙경
압축된 잠복기가 풀리면서
꽃의 비명이 바람에 실려 왔다
저, 출처 불분명의 레드카드
낯선 내가 뾰족이 돋았다
자정 부근에서야
어둠의 모서리에 오른쪽의 통증을 앉힌다
낡은 자명종 소리가 명쾌하게 번지면
조각난 봄의 퍼즐이 방안 가득 흩어지고
나는 다시, 나를 앓는다
칼날 같이 깊은 밤
공복의 위장이 허기를 바깥으로 출력하면
소원은 자주 초라해지고
미완의 날개는 천칭자리와 사수자리 사이쯤에 엉거주춤,
지독한 사랑은
오른쪽 등에서 태어나 겨드랑이를 가로질러
명치끝에서 머문다
ㅡ시집『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시인동네, 2021)
대상포진의 초기 증상은 감기와 비슷하다고 한다. 두통이 오고 몸살 난 것처럼 팔, 다리가 나른하고 쑤신다고 한다. 건강할 때는 숨어 있다가 피로가 쌓이거나 과로, 스트레를 받아서 면역력이 약해지면 정체를 드러낸다고 하는데 그 아픔과 고통이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이 대상포진이라는 병은 나에게도 낯설지 않고 익숙한 이름이다. 나와 친하지는 않지만 우리 집 사람과는 자주 친해서 툭 하면 찾아와 놀아달라고 떼를 쓰기 때문에 모른 척 할 수 없는 친구다. 동병상련이 아니라서 그 아픔의 크기를 짐작 못한다. 하지만 시에서 보듯 그 통증은 칼날이 살갗을 도려내는 것 같은 깊은 밤의 수렁을 동반하는 것 같은가 보다. 게다가 이 친구는 통증을 훑고 지나가면서 조심 안 하면 다시 또 찾아온다며 경고의 흔적까지 남기고 간다.
어쨌든 아주 고약한 녀석이라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대상포진은 몸에 무리가 가면 찾아온다고 하는 것을 보면 어떤 면에서 자기 스스로 키운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병에 안 걸리려면 식습관도 중요하지만 적당한 운동도 필수라는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기계도 오래 쓰면 오작동을 하듯 사람도 나이가 들면 오지 말래도 몸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이 찾아오는 것이 병이다. 아무리 관리를 잘한다고 해도 오는 것이 병이라면 조지훈 시인의 ‘병에게’ 라는 시에서 나오는 구절처럼 친구처럼 대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너무 혹사를 시켰다면 김제현 시인의 '몸에게' 시처럼 몸에게 사과 먼저 하고 반성부터 하는 것이 순서이겠다. 기왕 찾아온 병이라면 어차피 같이 살 수 밖에 없다면 불평하고 탓하기보다 조강지처, 조강지부 대하듯 다정히 맞이하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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