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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강물이었을 때/이토록

내가 강물이었을 때 ​ 이토록 ​ ​ 먼 산을 불러놓고 나는 그때 침묵했다 ​ 품 안에 너를 안고 울고 나면 다시 먼 산 ​ 숨결에 손이 스쳤던 그것도 꿈같았다 ​ 옛날의 일들이란 몸 안에서 출렁인다 ​ 이제 다시 먼 산을 우레처럼 갈 것이다 ​ 네 뼈를 만져보려고 생가슴을 찢었듯 ​ ​ ​ ㅡ웹진『공정한시인의사회』(2023, 2월호)

해동 /이삼현

해동 이삼현 네 식구였던 입이 둘로 줄어들자 먹을 것들이 남아돈다 미처 먹지 못해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가래떡을 출출할 때 드시라며 꺼내놓은 아내는 일하는 게 더 편하다고 알바하러 갔다 한파경보가 내린 날 냉동되었던 떡이 먹기 좋게 말랑말랑해졌을 즈음 아파트 세대를 돌며 소독하러 왔다고 벨을 누르느라 손발이 꽁꽁 얼어붙지나 않았는지 얼었다가 녹았다가 사는 일이 꼭 커다란 냉장고에 들락날락거리는 것만 같아 겨울이면 얼었다가 여름이면 녹기를 반복한다 긴장과 해이 딱딱해졌다가 다시 말랑말랑해진다 넷이었던 식구가 둘만 남았어도 밥상을 준비하는 아내 손은 쉬 줄어들 줄 모르고 고기를 굽거나 찌개를 끓일 때마다 장가가고 없는 2인분까지 넉넉히 준비한다 함께 먹지 못해 남겨진 아쉬움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내일은 첫째 몫..

해빙 /이삼현

해빙 이삼현 6호선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2호선에서 환승해 곁에 앉은 나어린 처자가 슬며시 머리를 기대 오네 그만 황송하고 죄송해 어찌할 바를 몰랐네 삼촌뻘 되는 사내 무엇에 끌려 다가오는 것이 황송함이라면 생판 모르는 여자에게 덥석 한쪽을 내주고도 태연한 것은 아내에 대한 죄송함이었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난감해하는데 아랑곳없이 곤한 자세로 단꿈을 꾸네 붉은 머리가 예쁜 오목눈이가 포르르 날아와 앉은 가볍지만 진중한 그 떨림에 가지만 남아 앙상한 겨울나무도 따라 흔들렸을까 아님, 한겨울이라는 걸 잊고 깜박 핀 진달래도 철없이 기대 오는 한 줄기 훈풍에 물든 연분홍일까 지긋이 전해오는 풋것의 온기에 다시 녹지 않을 것 같던 얼음장이 풀리고 있었네 한쪽 어깨부터 맥없이 ―『모던포엠』(2023, 2월호)

달팽이의 기억 /조광자

달팽이의 기억 조광자 생의 전부를 가두어온 담장 모퉁이에서 이상(李箱)의 날개를 보았다 이상의, 이상을 향한 접신의 순간에는 아슬한 희열을 동반한 분열 증세가 한나절 지속되었다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대부분의 시간에는 날개도 아지랑이처럼 실체가 없다 이번 생에서는 날개를 달아본 적 없었으므로 결코 원적이 될 수 없는 저곳이 생존의 본능만이 바닥을 치는 저곳이 유배당한 지구에서 피를 토하며 멜론을 달라고 부르짖었다는데 죽어가면서야 고향의 향기를 기억해내다니, 밑바닥에서 걸어온 고행의 길이 손바닥 안이라고 뿔을 쫑긋 온몸으로 밀고 가는 저것 ―시집『닿을 수 없는 슬픔에게』(문학의전당, 2022)

바람의 수화(手話) /문현숙

바람의 수화(手話) 문현숙 침묵은 침묵이 알아듣고 고요는 고요가 알아들어 저절로 깊어지는지 미루나무 이파리는 귓등을 타고 올라 말속 말을 찾아 내게 말하죠 나무의 말, 손이라도 잡아보고 싶어 덥석, 마음 먼저 쏘아 올려도 만질 수 없는 당신 내 발걸음 소릴 내가 들으며 산소 가는 길 바람이 끌어다 놓았나 당신, 발걸음 소리 천천히 뒤 따라 걸으며 괜찮다, 괜찮다 이만하면 괜찮다 가지를 흔든다 만져지지 않는 바람의 수화를 옮겨 전하는 이파리들 그, 낮은 속살거림이 묘비명 새겨진 묵언의 말씀되어 흠칫, 놀란 내 목덜미를 만지면 아버지 천 갈래 만 갈래 다녀가는 소리 절로절로 깊어가는 바람의 손짓들 ​ ―계간『서정시학』(2022, 봄호)

강, 그 어디쯤 /우은숙

강, 그 어디쯤 우은숙 기나긴 팔을 뻗어 초승달을 깨운 그녀 옆구리에 바람을 방언처럼 쏟아내고 부푸는 달빛 어깨에 꽃씨 하나 심어둔다 흐름의 머리맡에 푸른 안부 묻던 그녀 몸과 몸 포개놓고 눈부신 떨림으로 또 다른 생명을 키운다 젖줄을 부풀린다 발등 부은 경계에서 바다에 들기까지 그리움을 퍼다가 금강에 쏟고 나면 발꿈치 환해지는 빛 그녀 닮은 찔레 하나 ―『시조시학』(2022,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