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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당나귀들​ /장순금​​

어린 당나귀들 ​ 장순금​ ​ 기도는 이불 속에서 눈꼬리 눈물로 빗나갔다 반짓고리엔 녹슨 바늘이 아무것도 꿰맬 수 없는 너덜한 엄마처럼 문이 흔들릴 때마다 검은 사진에 빗물이 들이쳤다 한 세기 전 내가 홀로 서 있던 바닥처럼 어린 당나귀들은 엄마를 기다리며 아침 식탁에 굴러다니는 앙상한 기억으로 배를 채웠다 머나먼 고비사막 알타이산맥 우주 한 귀퉁이에서 엄마는 왜 가셨을까 부은 발은 견딜만한데 어디서 어긋난 걸까 한 세기 전 내가 홀로 울던 골목에서 어린 당나귀들은 올이 풀린 뒤축을 끌며 등짝의 천 근 무게의 살과 뼈를 일당과 바꾸었다 아침마다 밥상 모서리에 걸려 넘어진 엄마를 열면 검은 반짓고리에 검불로 뒤축을 꿰매고 있어 어린 당나귀들의 그리움은 구천의 붉은 신호를 잡고 있나 그림자에 붙들린 기도는 ..

서운암 돌확 어리연꽃 /정현숙

서운암 돌확 어리연꽃 정현숙 발 담가 사는 곳이 흙과 늪 아니라도 삼백예순다섯 날 미륵 향해 다가선 너 먼 우주 별꽃 다발도 등불처럼 흔들린다 눈곱 뗀 텃새에게 물 한 모금 보시하고 장경각 문틈으로 새는 경經 들으면서 누군가 흘린 덕담도 맷방석에 앉힌다 는개가 빚은 구슬 염주로 꿰어갈 때 좔좔댄 물소리가 햇볕 서책 엮는 골짝 귀 시린 빛의 무아에 눈을 떼지 못한다 ―『좋은시조』(2022, 겨울호)

허언虛言은 세다 /나영채

허언虛言은 세다 나영채 내일이라는 곳 그곳을 기다려 본다는 것 불콰하게 술 오른 노점 수리공의 허언 같은 것 걱정하지 말라는 그 말을 걱정하다가도 저의 실력을 믿으라는 허언을 내뱉는 내일이라는 낱장 걸핏하면 내일 오라는 말 내일이라는 말엔 적당한 기대가 있듯 내일 이야기하자는 말 그 내일을 믿지 못하면 또 어쩔 텐가 아무리 가기 싫어 버틴다 해도 내일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새순처럼 뾰족하게 돋아나기도 하고 먹빛 구름 뒤에 장대비처럼 오기도 한다 그러나 내일에겐 또 내일이 있어 차일피일 미루어지다 곧 바닥나는 것들이 있을 테지 굴복한 어제를 오늘에 중첩시킨다는 것은 밑천이라는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는 힘은 아닐까 그러니 내일은 힘이 세다 연체에 밀린 빚도 오늘의 체불도 내일이면 말끔히 해결된다고 장담하는 내..

지극한 설득 /나영채

지극한 설득 나영채 고요한 봄의 땅속에서 지금 치열한 설득이 시작되고 있다 지렁이들같이, 양서류같이 꿈틀거리는 근처 냇물 풀리는 소리를 들려주며 목피를 단단히 닫아걸고 웅크리고 있는 씨앗들 지구의 깊은 곳 그 불타는 뜨거운 중심을 향해 잔뿌리로 쬐던 뿌리들을 향해 이제 그 마음을 풀라고 햇볕과 훈훈한 바람으로 설득 중이다 다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지난겨울은 잊고 23.5도의 기울기만큼의 결심이면 얼었던 땅이 녹는 일이나 무뚝뚝했던 나뭇가지들 끝이 노랗게 움트는 일은 일도 아니라고 물의 목소리 훈훈하게 변했다고 설득 중이다 자연의 설득력은 지극한 진실이며 꽃잎 같은 질감이어서 통하지 않는 일은 없다 이 끝없는 우주도 지구의 기울기를 태양 쪽으로 밀어주고 있으니까 씨앗들은 믿는 것이다 가지런한 밭의 고랑과 하..

달의 맛 /나영채

달의 맛 나영채 간장 항아리는 한밤에도 잠들지 않고 둥그런 달 하나를 품고 뒤척였지 초승달이 보름달로 자라듯이 간장도 시나브로 익어가고 있었지 짜디짠 바다를 풀고 때를 기다리면 어둠과 간장은 동색이어서 간장 속 달은 제 흰색을 다 빨리고 검은 바다에 주저앉아 있었지 어둑한 새벽의 끄트머리가 간장 항아리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본 적 있지 방치하면 알 수 없는 꽃이 피어나 장맛은 근심으로 부글부글 끓어올랐지 구름이 가까이 다가오면 비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옥상 계단을 오르는 어머니는 씨간장을 지키며 늙어가지 간장 항아리는 바다와 하늘과 땅을 품고 깊고 오묘하게 깊어가지 간장이 바닥날 즈음 저 혼자 둥둥 떠서 지구 밖으로 날아가는 쪼글쪼글한 달을 본 적도 있어 그래서일까 처음 떠온 간장에서는 보름달 맛이 나..

별지화(別枝畵) /김숙영

별지화(別枝畵) 김숙영 처마 밑 연꽃이 천년을 산다 진흙 물결도 없는데 한 번 돋아나면 오직 적멸을 향해 움직인다 그러니 꽃은 피고 지는 게 아니라 화려함 뒤에 숨어 나무의 숨결과 함께 천천히 조금씩 흩어지고 있는 거다 처음엔 그저 썩지 않게 다스리는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틈 하나 없이 나무를 껴안고 놓지 않는다 이것은 밀봉이 아니라 밀착 색(色)이 공(空)을 향해 걸어가려는 의지 봉황의 춤이 허공중에 스민다 바람이 색을 민다 풍경 소리가 찰방찰방 헤엄친다 지붕 아래 꽃들이 소리 나는 쪽을 본다 색과 색이 만나 서로의 색을 탐독한다 꽃의 안쪽을 볼 수 있는 안목이 될 때까지 나는 화두 밑을 걷고 또 걷는다 머리 위에 꽃의 말이 내려앉는다 대웅전 안쪽 문수보살이 아무도 모르게 웃을 것만 같다 몸속이 화심(..

흑백 사진 /윤경희

흑백 사진 윤경희 가진 것 없었지만 마냥 행복했었던 자꾸만 허기지는 아득한 기억 너머 가난은 늘 부재여서 메아리도 없는 걸까 당기면 당길수록 통점으로 박여오고 세월을 역류하는 외고집의 내 그리움 한 번쯤 그 길목에서 당신을 만나고 싶다 앞개울 맨발로 선 미루나무 그늘처럼 한 지붕 함께여서 단단했던 뿌리들 다정히 나를 부른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시와소금』 (2022,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