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매 /이남순 남명매 이남순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남명로 311 좁고 낮은 쪽문을 머리 숙여 들어서니 젖은 듯 형형한 등불 아직도 걸려있다 여윈 가지 꺾어지고 둥치가 틀어져도 비루한 왕업 앞에 차라리 회초리였던 눈발에 깨어난 혼령 옷띠 매고 앉았다 불의도 정의마저도 타산으로 공정 되는 벼슬아치 과녁으로 피 흘리던 백성의 길 앙다문 입술을 열어 상소문을 읽고 있다 ―『시와소금』 (2022, 겨울호) 시조♠감상해 보자 2023.01.26
고비 /김명인 고비 김명인 부여잡은 몇 줄에 걸려 넘어지면서 무엇에 홀린 걸까, 이 새벽까지 나는 왜 두서없는 글머리와 씨름하는가? 굽이굽이 붓방아 찍어대는 무딘 연필 네가 무엇으로 짧아지든 몽당빗자루보다 두려울 리 없지만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공포를 잠재우고 파지를 쓸어모으고 잠자리를 편다 썼다 지우는 몇 줄 행간이 고비보다 거친 종이 사막임을 곡마(曲馬)의 무릎을 끌어안고서야 깨닫는다 저 말들 주저앉을 때까지 모든 고비는 초심으로 넘어야지! ―『문학청춘』(2022, 가을호)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2023.01.26
소녀 /박명숙 소녀 박명숙 총총 땋은 네 머리가 이삭으로 여물어 가던 보리밭 여름 한철이 세상 너머 일렁일 때 깜부기 풀어헤친 머리로 나도 거기 서 있었지 ―『시조21』(2022, 봄호) 시조♠감상해 보자 2023.01.25
미루나무 길은 안녕할까 /김선희 미루나무 길은 안녕할까 김선희 오랜 가뭄으로 대청호에 물이 줄어 가장자리에 나이테처럼 결이 생겼다 저쯤이면 우리 집인 것 같아 그 언저리까지 돌팔매를 던져본다 풍덩 소리를 내며 깊고 나직한 한숨이 강바닥에 드러눕는다 칠 남매가 살을 부비며 곰실곰실 살아가던 곳 속을 보이면 금방이라도 걸어갈 듯 가까운데 빗장을 잠근 듯 고요하다 가뭄이 심했던 어느 해엔 동네 길바닥과 항아리들도 올라왔다던 곳 새말 할머니 댁 가는 미루나무 길가에 피어나던 붉은 참나리 꽃은 물속에서 계절을 잊은 걸까 오랜 가뭄에도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지 않는 미루나무 길 구불구불 할머니를 닮은 그 길을 마음으로 걸어가며 강둑으로 넘어오는 물안개를 따라가 본다 ―시집『감등을 켜다』(천년의시작, 2022)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2023.01.25
투병 /이태정 투병 이태정 이제부터 내게 함부로 하지 않겠다 나를 온전히 내것이라 하지 않겠다 그동안 아무렇게나 팽개쳐서 미안하다 정중히 물어보고 오롯이 보듬으며 고운 눈빛으로 꽃처럼 살피겠다 원해서 함께한 일 아니라도 사이좋게 나란히 ―시조집『빈집』(책만드는 집, 2022) 시조♠감상해 보자 2023.01.24
봄잠 설치며 ㅡ민화(民畵) 6 /정양 봄잠 설치며 ㅡ민화(民畵) 6 정양 눈 쌓인 긴긴 겨울밤도 지나고 봄꽃들 다투어 피고 지도록 기다리는 도둑은 오지 않고 도둑 대신 여산댁이 도둑과 배맞은 쥐도 새도 모를 그 일이 동네방네 소문이 되어 찾아왔다 여산댁이 도둑과 배맞던 소리 여산댁 몸 허물어지던 소리를 여산댁 가까이 다가온 줄도 모르고 가지가지로 보태어 시늉하면서 우물가에 자글자글 키득이던 아낙네들이 여산댁 다가온 걸 알아채고 금세 조용해진다 어느 귀 밝은 고망쥐가 그날 밤 그 소리 다 듣고 저렇게 다 풀어놓았나 참말로 귀신 곡할 노릇이지만 그게 다 사실인 걸 어쩌랴 애간장이 썩어도 이를 악물고 여산댁은 한세상 뻔뻔해질 수밖에 없다 누가 그 고망쥐 노릇을 했는지보다 더 궁금한 게 도둑의 안부다 아무에게나 몸 내맡기고 싶은 이 봄날 다 가기 ..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2023.01.24
양로원 /두마리아 양로원 두마리아 어르신 호칭에 발끈하는 남자와 전철 빈자리 가방부터 던지는 여자가 병들고 늙은 반려견과 느릿느릿 사는 집 ㅡ『시조21』(2022, 겨울호)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2023.01.21
서쪽 /홍일표 서쪽 홍일표 빛을 탕진한 저녁노을은 누구의 혀인지 불붙어 타오르다가 어둠과 연대한 마음들이 몰려가는 곳은 어느 계절의 무덤인지 돌의 살점을 떼어낸 자리에 묻혀 숨 쉬지 않는 문자들 하늘은 돌아서서 흐르는 강물에 몸 담그고 돌멩이 같은 발을 씻는다 밤새 걸어온 새벽의 어두운 발목이 맑아질 때까지 딛고 오르던 모국어를 버리고 맨발로 걸어와 불을 밝히는 장미 몇 번의 생을 거듭하며 붉은 글자들이 줄줄이 색을 지우고 공중의 구름을 중얼거리며 흩어 진다 마음 밖으로 튀어나온 질문이 쓸쓸해지는 해 질 녘 걸음이 빨라진 가을이 서둘러 입을 닫는다 뼈도 살도 없이 오래된 이름을 내려놓고 날아가는 구름 비누거품 같은 바람의 살갗이라고 한다 허공을 가늘게 꼬아 휘파람 부는 찌르레기 입술이 보이지 않아 아득하다는..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2023.01.21
늦게 오는 사람 /이잠 늦게 오는 사람 이잠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 말없이 마주 앉아 쪽파를 다듬다 허리 펴고 일어나 절여 놓은 배추 뒤집으러 갔다 오는 사랑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순한 사람을 만나 모양도 뿌리도 없이 물드는 사랑을 하고 싶다 어디 있다 이제 왔냐고 손목 잡아끌어 부평초 흐르는 몸 주저앉히는 이별 없는 사랑 어리숙한 사람끼리 어깨 기대어 졸다 깨다 가물가물 밤새 켜도 닳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다 내가 누군지도 까먹고 삶과 죽음도 잊고 처음도 끝도 없어 더는 부족함이 없는 사랑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뜨거워서 데일 일 없는 사랑을 하고 싶다 살아온 날들 하도 추워서 눈물로 쏟으려 할 때 더듬더듬 온기로 뎁혀 주는 사랑 —시집 『늦게 오는 사람』 (파란.. 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2023.01.21
다음에 /김희선 다음에 김희선 어머니 지금은 바빠 다음에 찾아뵐게요 다음이 영원이 된 날 그제서야 알았다 다음은 없다는 것을 지금이 전부라는 걸 다음에란 말 뒤에 웅크린 상실감 시간을 되돌려 말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오늘 갈게요 들려드릴 한마디 ―『시조21』(2022, 겨울호) 시조♠감상해 보자 2023.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