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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홍일표
빛을 탕진한 저녁노을은 누구의 혀인지
불붙어 타오르다가 어둠과 연대한 마음들이 몰려가는 곳은
어느 계절의 무덤인지
돌의 살점을 떼어낸 자리에 묻혀 숨 쉬지 않는 문자들
하늘은 돌아서서
흐르는 강물에 몸 담그고 돌멩이 같은 발을 씻는다
밤새 걸어온 새벽의 어두운 발목이 맑아질 때까지
딛고 오르던 모국어를 버리고
맨발로 걸어와 불을 밝히는 장미
몇 번의 생을 거듭하며
붉은 글자들이 줄줄이 색을 지우고 공중의 구름을 중얼거리며 흩어
진다
마음 밖으로 튀어나온 질문이 쓸쓸해지는 해 질 녘
걸음이 빨라진 가을이 서둘러 입을 닫는다
뼈도 살도 없이
오래된 이름을 내려놓고 날아가는 구름
비누거품 같은 바람의 살갗이라고 한다
허공을 가늘게 꼬아 휘파람 부는 찌르레기
입술이 보이지 않아 아득하다는 말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
―월간 『문학사상』(2021,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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