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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잠 설치며
ㅡ민화(民畵) 6
정양
눈 쌓인 긴긴 겨울밤도 지나고
봄꽃들 다투어 피고 지도록
기다리는 도둑은 오지 않고
도둑 대신 여산댁이 도둑과 배맞은
쥐도 새도 모를 그 일이
동네방네 소문이 되어 찾아왔다
여산댁이 도둑과 배맞던 소리
여산댁 몸 허물어지던 소리를
여산댁 가까이 다가온 줄도 모르고
가지가지로 보태어 시늉하면서
우물가에 자글자글 키득이던 아낙네들이
여산댁 다가온 걸 알아채고 금세 조용해진다
어느 귀 밝은 고망쥐가
그날 밤 그 소리 다 듣고
저렇게 다 풀어놓았나
참말로 귀신 곡할 노릇이지만
그게 다 사실인 걸 어쩌랴
애간장이 썩어도 이를 악물고
여산댁은 한세상 뻔뻔해질 수밖에 없다
누가 그 고망쥐 노릇을 했는지보다
더 궁금한 게 도둑의 안부다
아무에게나 몸 내맡기고 싶은
이 봄날 다 가기 전에
봄잠 설치며 여산댁은
도둑이 도둑처럼 찾아올
그날만 기다린다
ㅡ 『LITOPIA리토피아』 (2022,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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