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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끝에서​ /우남정

오래된 끝에서 ​우남정 ​ 흘러넘치듯 능소화가 담벼락에 매달려 있다 열매는 꽃에 매달리고 꽃은 줄기에 매달리고 줄기는 뿌리에 매달린다 뿌리는 지구에 매달려 있고 지구는 우주에 매달려있다 매달린 것을 잊고 매달려 있다 산다는 것이 매달리는 것일까 저 여자의 가슴에 젖이 매달리고 등에 아이가 매달리고 팔에 장바구니가 매달리고 장바구니는 시장에 매달리고 저 여자는 집에 매달려 있다 손가락은 카톡에 매달려 있고 수많은 당신에 매달려 있다 당신은 씨줄과 날줄, 그물에 매달려 있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오래된 슬픔이 묻어난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핏방울이 맺혀있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굴욕의 기미가 있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솟구치다’의 그림자가 매달려 있다 그 끝에 거꾸로 솟은 종유석이 자란다 매달리는 ..

능소화 /이동화

능소화 이동화 능소화 진다 한 세계가 닫혀야 또 한 세계가 열리는 까닭을 당신은 알고 있었을까 해 뜨고 바람이 불어오는 곳 고사목이 된 늙은 아버지 검은 몸 안에서 새들도 슬프게 저물어가고 있다 새순을 열고 꽃을 피우고 푸른 계절을 넝쿨로 채우던 시간이 나무의 바깥을 향하는 길이었으니 단 한 번의 풍요를 위해 마음은 얼마나 더 가난해져야 하는가 꽃 진다고 나를 당신의 바깥이라 말하지 말라 능소화 질긴 넝쿨손처럼 치열했던 당신 맨땅 위에 뒹구는 통꽃처럼 삶은 허망하여도 아름답게 가는 여름 있으니 ―계간『열린시학』(2022년 겨울호)

정인보 -자모사(慈母詞) 40수

자모사(慈母詞) 1- 40수 정인보 1 가을은 그 가을이 바람불고 잎 드는데 가신 님 어이하여 돌오실 줄 모르는가 살뜰히 기르신 아이 옷 품 준 줄 아소서 2 부른 배 골리보고 나은 얼굴 병만 여겨 하루도 열두 시로 곧 어떨까 하시더니 밤송인 쭉으렁*인 채 그지 달려 삽내다 3 동창에 해는 뜨나 님 계실 때 아니로다 이 설움 오늘날을 알았드면 저즘미리 먹은 맘 다 된다기로 앞 떠날 줄 있으리 4 차마 님의 낯을 흙으로 가리단 말 우굿이* 어겼으니 무정할 손 추초(秋草)로다 밤 이여 꿈에 뵈오니 편안이나 하신가 5 반갑던 님의 글월 설움될 줄 알았으리 줄줄이 흐르는 정 상기 아니 말랐도다 받들어 낯에 대이니 배이는* 듯하여라 6 므가나* 나를 고히 보심 생각하면 되 서워라 내 양자(樣子)* 그대로를 님이 ..

어쩌다 지하에 들다 /최연하

어쩌다 지하 최연하 유빙처럼 떠도는 영혼들 널빤지 위에 웅크린 잠 신문지로 불안한 잠을 덮고 가슴속 상처를 감추고 있습니다 시멘트 바닥의 냉기보다 가족에게서 잊히는 것이 더 두려운 사람들 술병을 아내처럼 끼고 삽니다 경로를 이탈한 오작동을 누가 복원해 줄 수 있을까요 바닥에서 몸 하나 일으켜 세우지 못하는 무기력에 점점 음지가 되어갑니다 해를 등지고 멀리 와 버린 사람들 과거로 페달을 돌려보지만, 눈을 뜨면 늘 제자리에 멈춰있습니다 한 줌 햇살이 아쉬운 깊은 지하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역 하나를 붙잡고 빙빙 돌고 있습니다 ㅡ계간 《열린시학》 (2022, 겨울호)

젓가락을 놓으며 /이상길

젓가락을 놓으며 이상길 십원짜리 지폐 두 장이 오천원이 넘도록 반 백년을 넘게 비워 온 짜장면 한 그릇 시커먼 춘장 돼지기름에 달달 볶아 양파며 감자 고기 몇 점 고소하게 씹히던 그 옛날 맛은 아니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아버지가 사주시던 기억에 가끔은 애틋해지고 이제는 그때의 당신보다 더 늙어버린 씁쓸히 웃으며 비우는 오늘 또다시 짜장면 한 그릇 ―계간『詩하늘 108』(2022년 겨울호)

슬하(膝下) /구애영

슬하(膝下) 구애영 해거름 갯벌 자락 황홀이 숨어듭니다 저녁의 가솔(家率)인 듯 구멍들이 꿈틀대고 발가락 간질거린 미물 제 안에 길을 냅니다 해산 앞둔 진통에도 당신은 허리를 굽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굵은 저녁을 캡니다 통증도 세상의 안쪽이니 여울되어 지나간다고 비유도 상징도 가당찮은 몸짓으로 몸이 될 때까지 조가비는 물 때 품고 하나로 가득 찬 동심원 맨살로 차오릅니다 ㅡ한국여성시조문학회 『여성시조』(2021, 제2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