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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눈사람 임양호 밤사이 누가 왔나 봐요 문밖이 수북하네요 하지 못해 빛났던 말들이 저렇게나 많은 양 어둠에 기댄 순결의 높이가 참 놀랍네요 그 기다랗던 밤에 잠도 오지 않았던 것은 소리 없이 오는 그대 발자국에 귀 기울이다 동짓날 새알심같이 마음만 웅크려 하얗게 동그래졌잖아요 이 계절이면 하나씩 눈 속에서 애인들이 움트는데요 이행치 못한 하얀 약속의 페이지 같아요 모든 언약들을 펼쳐놓고 얘기 좀 해봐요 눈동자에 서로의 모습만 비추어 보며 안아주면 녹아 사라질까 마음에만 머물기로 해요 그럼 전설은 처마 밑 거꾸로 커가는 고드름의 그리움만 같아서 언젠가 제 무게로 떨어져 심장을 쑤시고 들어올 거예요 그땐 아리고 아파 녹아 없어졌다 말하진 못할 거예요 생의 흐린 날에 만나 맑은 날에 사라지는 눈사람 애인 ―『시..

씨앗젓갈 /이명희

씨앗젓갈 이명희 대명항 젓갈 판매소 씨앗젓갈 글자가 나를 끌어당겼다 어떤 씨앗으로 담은 젓갈일까 궁금해 사 온 씨앗젓갈 날치알 청어알 명태알, 호박씨 해바라기씨가 섞여 있다 바다에 알을 뿌리지 못하고 들로 나가 싹을 틔우지 못하고 짜디짠 젓갈이 되어 씨앗인 척 이름만 지닌 저것들 사람의 몸에 씨를 뿌린다 나는 이미 죽은 씨앗을 삼킨다 헤엄치지 못한 수많은 명태가 내 몸에서 아우성친다 한때 씨앗 창고였지만 씨앗을 뿌릴 수 없는 몸 그들이 힘을 주며 일으켜 세운다 저 죽은 씨앗을 먹고도 우리는 살아간다 씨앗은 죽어서도 산다 ―시집『바람의 수첩』(시산맥, 2022)

월동 /김이듬

월동 김이듬 폐쇄하고 싶었을 것이다 일 년 중 며칠이라도 문을 닫아걸고 싶었을 것이다 호수는 수면이 온통 문이라서 비가 오면 비를 받고 바람 불면 물결치기 바빴다 빵 부스러기나 쓰레기를 던져 넣어도 막을 수 없었다 첨벙첨벙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새와 구름과 측백나무까지 사방에서 투신하는 그것들을 사랑했다 단지 얼비치는 그림자인 줄 모르고 내부는 언제나 번잡했다 찬란했던 수련 군락도 다정했던 청둥오리 떼도 한때였다 문득 호수는 고마웠을 것이다 몰아닥친 한파가 그날 밤 호수는 얼어붙었다 이튿날 폭설까지 쏟아져 호수는 새하얗게 뒤덮었다 바깥에서는 전혀 호수 내부가 보이지 않았을 때 호수는 투명하게 내면을 응시하는 듯했다 비로소 무문관이 되어 자기 안에 서식하는 침묵을 보았다 스스로 수질을 살폈고 시꺼메진 ..

할미새한테서 전화가 왔다 /박희선

할미새한테서 전화가 왔다 박희선 늙은 소나무에 세 들어 사는 할미새 할미한테서 아침 일찍 전화가 왔다 집안에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왜 보름째나 밭에 올라오지 않느냐 몹시 궁금해서 전화를 했단다 아내가 몸이 안 좋다고 했더니 지난봄에 큰 수술한 곳이 지금도 많이 아프냐고 되물었다 감나무와 호두나무 대추나무들 고라니와 멧돼지, 곤줄박이와 콩새 산비둘기까지도 내가 보고 싶어 모두 안달이 났다고 하얀 거짓말까지 보탰다 우리 보리밭은 잘 있느냐고 물었더니 며칠 전에 고라니 큰삼촌이 돌아가셔서 온 집안이 조용히 보낸다고 말했다 지난 장날부터 호두나무 옆에 도라지꽃들이 만발했는데 자기는 보랏빛 꽃보다 흰 꽃이 더 예쁘다면서 혼자 웃었다 ―시집「할미새한테서 전화가 왔다」(詩와에세이, 2021)

눈사람의 기분 /하린

눈사람의 기분 하 린 어떻든 사람입니다 천사가 아닙니다 마당이거나 골목이거나 언덕이거나 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랫목은 어디입니까 고드름은 왜 생깁니까 그것이 궁금하다면 당신은 백색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로부터 주관성을 부여받았습니다 눈 속의 눈이 생길 수 있고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 많은 감정이 없습니다만 특별한 비밀이 있습니다 적막과 대면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뼈와 살과 피와 심장과 마음이 하나라는 착각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아이가 잠든 사이에 길고양이를 찾아 나설 참입니다 나를 보고 놀라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물어볼 것입니다 벌벌 떨고 있는 배고픈 새끼 고양이를 만난다면 처음으로 울 것입니다 그만 녹아 흐를 것입니다 머리가 재빨리 심장에 달라..

또 불은 누가 켤까 /우아지

또 불은 누가 켤까 우아지 어머니 떠나신 방 물음표가 앉아 있다 혼잣말이 다닥다닥 말라붙은 부엌 바닥 나팔꽃 저물어 갈 때 고봉밥이 피어난다 유마경 외고 있는 구순의 울 아버지 고양이 밥그릇은 다 저녁 소일거리 하루가 문 닫아걸면 눈을 뜨는 뭇별들 아랫목 이불 덮고 누워서 쓰던 일기 지금은 작은 몸집 등 굽은 대들보 아래 효도를 다짐한 일기장 내 유년이 다가선다 ―시집『또 불은 누가 켤까』(신생시선, 2022)

저녁연기 /박희선

저녁연기 박희선 찐 고구마 두 개 두유 한 통으로 복사꽃 그늘에서 새참을 먹었다 내 뱃속에서 밥 달라고 보채는 청개구리 울음을 간신히 잠재웠다 온종일 쇠스랑으로 감자밭만 장만하고 빈 지게만 지고 돌아오는데 누가 내 허리에 천 근 납덩이를 매달았나 두 무릎에서는 자갈자갈 자갈밭 밟는 소리가 너무나 아팠다 산 그림자 속에 외딴집 굴뚝에 저녁연기가 꿈처럼 올라간다 지난겨울 큰 수술을 받은 아내가 일어난 것일까 아침에 차려주고 온 흰죽을 다 비웠을까 잠자던 아궁이에 누가 불을 지피는가 누군가 부엌문을 반쯤 열고 나와 한 번만 웃어주었으면 정말 행복하겠다 내가 너무 큰 욕심을 부렸나 봄 하늘 초승달이 내 마음 먼저 알고 까르르 웃는다 ―『문학과창작』)2022-겨울호)

세들의 천국 /이태정

세들의 천국 이태정 내 안에 세 들어 사는 게 너무 많아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등골이 휘어지도록 날아드는 세들은 아차, 하는 순간 몸집을 불리닥 더 빠른 속도로 자꾸만 재촉합니다 탈탈탈 영혼까지 털리면 한 달이 지나갑니다 안부 편지 한 통 없는 우체통 그 안은 세들만 도란도란 모여서 기다려요 재산세, 주권 없는 주민세, 자동차세, 세들의 천국 ―시조집『빈집』(책만드는 집, 2022)

겨울 숲에서 /안도현

겨울 숲에서 안도현 참나무 자작나무 마른 잎사귀를 밟으며 첫눈이 내립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왠지 그대가 올 것 같아 나는 겨울 숲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그대를 기다립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나는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이 계절에서 저 계절을 기다리는 헐벗은 나무들도 모두 그래서 사랑에 빠진 것이겠지요 눈이 쌓일수록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송두리째 버리는 숲을 보며 그대를 사랑하는 동안 내 마음 속 헛된 욕심이며 보잘것없는 지식들을 내 삶의 골짜기에 퍼붓기 시작하는 저 숫눈발 속에다 하나 남김없이 묻어야 함을 압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따뜻한 아궁이가 있는 사람들의 마을로 내가 돌아가야 할 길도 지워지고 기다림으로 부르르 몸 떠는 빈 겨울 나무들의 숲으로 그대 올 때는 천지사방 가슴 벅찬 폭설로 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