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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임양호
밤사이 누가 왔나 봐요
문밖이 수북하네요
하지 못해 빛났던 말들이
저렇게나 많은 양
어둠에 기댄 순결의 높이가
참 놀랍네요
그 기다랗던 밤에 잠도
오지 않았던 것은
소리 없이 오는 그대 발자국에
귀 기울이다
동짓날 새알심같이
마음만 웅크려 하얗게 동그래졌잖아요
이 계절이면 하나씩
눈 속에서 애인들이 움트는데요
이행치 못한 하얀 약속의 페이지 같아요
모든 언약들을 펼쳐놓고
얘기 좀 해봐요
눈동자에 서로의 모습만
비추어 보며
안아주면 녹아 사라질까
마음에만 머물기로 해요
그럼 전설은 처마 밑
거꾸로 커가는 고드름의
그리움만 같아서
언젠가 제 무게로 떨어져
심장을 쑤시고 들어올 거예요
그땐 아리고 아파
녹아 없어졌다 말하진
못할 거예요
생의 흐린 날에 만나
맑은 날에 사라지는
눈사람 애인
―『시와소금(2022,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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