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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기일식 /이우디

개기일식 이우디 천만년 전 홈질해 둔 달빛 실밥이 풀린 날 우연 아닌 운명이라고 말하던 너의 눈빛이 에피소드 하나 풀어놓듯 수천수만 어느 하루 좋은 기억이 마시멜로 맛 보드라운 이야기를 실시간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생중계하는 느낌이다 교차 편집된 화면 속에서 우리 빈틈없이 하나가 된 날 목덜미 간질이던 입김이 서로의 마음 인터뷰하듯 너의 눈동자 속으로 사라진 퍼포먼스는 멜로 미침을 나눔, 하던 시절이 만든 자리에서 말랑해진 어둠과 빛 이해한 듯 떠나지 못한 뼈만 남은 설렘, 에 어떤 마법을 쓸까 잃어버리지 못한 너, 이후 잊힐 리 없는 기억 달꽃의 콘서트_소원을 시작해 봐 마지막은 오지 않는다 기다림에 물 주는 날을 시작할 뿐 꽃이 필 때거나 질 때거나 뻔뻔한 세금처럼 대가가 필요하거든 다른 듯 같은 인..

다도해 /전병석

다도해 전병석 외로운 사람이 바닷가에 서서 수평선을 향해 외로움을 던지면 수평선을 넘지 못한 외로움은 솟아올라 섬이 된다 작은 외로움은 작은 섬으로 더 큰 외로움은 더 큰 섬으로 저 많은 다도해의 섬은 외로운 사람이 던진 외로움이다 외로움을 모르거나 외로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섬과 섬 사이에 다리를 놓지만 외로움을 알거나 외로움을 사랑하는 사람은 섬과 섬 사이에 외로움을 놓는다 눈물은 눈물로 위로하듯이 외로움은 외로움만으로 건널 수 있다 다시는 건널 외로움이 없을 때 비로소 외로움은 수평선을 넘어간다 보라, 저 많은 다도해의 외로운 사람이 던진 외로움을 ㅡ시집 『화본역』(문학청춘, 2022)

너의 손금 속에는 /백이운

너의 손금 속에는 백이운 어릴 적 놓쳐 버린 개울가 고무신 한 짝 세공하듯 밤을 밝힌 원고지 빈칸이며 젊은 날 온몸으로 듣던 비창悲愴이 새겨 있다. 자탄과 자아도취로 들끓던 찻주전자 누군가에게 보내졌을 한밤의 감사 기도와 때로는 스스로를 키운 진심어린 독백까지. 네가 살아온 길과 걸어가야 할 길 지금 네가 좋아하는 음악과 차와 잊었던 나의 울음이 헛것인 듯 새겨 있다. ―시조집『고요의 순간들을 무엇으로 살았는가』(북치는소년, 2022)

가을 서정 /이종곤

가을 서정 이종곤 나의 구월은 바이러스가 먹었다 목구멍 너머 모스크의 아잔이 된 기침은 빚쟁이처럼 시월로 이월되었을 뿐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계절이 오가는 하늘은 잠시 구름 위로 내려앉아 부유하는 생각들 비로 침전시켜 자꾸 허기가 지는 거리 다시 생각은 단풍 든 숲으로 간다 지금은 오색딱따구리도 집을 짓지 않고 어느 새 기우는 햇빛에 구도하는 수도승 찬란했던 초록의 꿈을 접고 그리움과 아쉬움의 혼혈들이 조용히 반성하는 시간 거기 한 자리에 언제부터 서 있었나 모진 풍파를 딛고 다만 흔들릴 뿐 인고의 물관을 지나면 풍요로운 이 계절 무리로 피어 깊은 향기 내뿜는 산국을 보라 ―계간『詩하늘 108』(2022년 겨울호)

물소리 /유계자

물소리 유계자 철퍽철퍽 한나절 수차를 밟는 염부의 걸음이 방금 걷어 올린 미역처럼 후줄근하다 소금창고 가는 길, 짊어진 소금가마가 기우뚱 바닷물 저장고에 떨어져 버렸다 염천에 점심이나 먹고 건져야겠다며 담배 한 대 피우고 소금을 찾으러 갔더니 빈 가마만 동동 바닷물이 낳은 소금 서둘러 왔던 곳으로 돌아가 버리고 선술집에서 만난 소금꽃 같던 여자 날 못 믿느냐며 가을 함초 같이 붉은 입술로 평생 수차의 지팡이가 되어주겠다던 그 여자 소금처럼 짜디짠 눈물까지 저당 잡히고는 걸음을 지워버렸다 수차를 굴리다가 수차례 사금파리 같은 이름 다 잊었노라 염판에 엎드려 저녁노을에게 큰소리치다가 철벅철벅 세상은 잘도 돌아가는데 온종일 돌아도 염천은 염전 맨발의 염부는 딱 한 번 염천을 벗어나 바다로 돌아가고 세상에서 건..

오늘의 레퀴엠 ​/우남정

오늘의 레퀴엠 ​ 우남정 붉은 뿌리를 잘라내고 소금물에 데친 주검을 먹는다 등뼈에 칼집을 넣어 발라 회친 주검을 먹는다 가마솥에 고아 낸 흐물거리는 주검을 먹는다 주검은 뜨겁고 달콤하고 비릿하다 꽃무늬 접시에 주검을 올린다 주검에 고명을 올린다 마트에서 순교한 죽음들을 세일하고 있다 신선한 주검을 고른다 누군가의 주검을 먹고 누군가의 죽음이 자라난다 무덤에 돋아나는 오랑캐꽃 사랑한 것들의 주검에 꽃이 핀다 죽음의 젖을 물고 푸른 상수리 나뭇잎에서 눈물이 반짝 빛난다 나는 배가 고프다 네 영혼의 마지막까지 갉아먹고 떠나려, 작정한 듯 ―시집『뱀파이어의 봄』(천년의시작,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