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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지화(別枝畵)
김숙영
처마 밑 연꽃이 천년을 산다
진흙 물결도 없는데
한 번 돋아나면 오직 적멸을 향해 움직인다
그러니 꽃은 피고 지는 게 아니라
화려함 뒤에 숨어
나무의 숨결과 함께
천천히 조금씩 흩어지고 있는 거다
처음엔 그저 썩지 않게
다스리는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틈 하나 없이
나무를 껴안고 놓지 않는다
이것은 밀봉이 아니라 밀착
색(色)이 공(空)을 향해 걸어가려는 의지
봉황의 춤이 허공중에 스민다
바람이 색을 민다
풍경 소리가 찰방찰방 헤엄친다
지붕 아래 꽃들이 소리 나는 쪽을 본다
색과 색이 만나 서로의 색을 탐독한다
꽃의 안쪽을 볼 수 있는 안목이 될 때까지
나는 화두 밑을 걷고 또 걷는다
머리 위에 꽃의 말이 내려앉는다
대웅전 안쪽 문수보살이
아무도 모르게 웃을 것만 같다
몸속이 화심(花心)으로 가득 찬 기분
꽃의 마음이란
식물성 부처를 만나는 일이었을까
절 쪽만 바라봐도
날개를 편 단청이 꿈속으로 날아왔다
—2022 제1회 천태문학상 대상 수상작
—시집 『별들이 노크해도 난 창문을 열 수 없고』( 더푸른출판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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