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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맛
나영채
간장 항아리는 한밤에도 잠들지 않고
둥그런 달 하나를 품고 뒤척였지
초승달이 보름달로 자라듯이
간장도 시나브로 익어가고 있었지
짜디짠 바다를 풀고 때를 기다리면
어둠과 간장은 동색이어서
간장 속 달은 제 흰색을 다 빨리고
검은 바다에 주저앉아 있었지
어둑한 새벽의 끄트머리가 간장 항아리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본 적 있지
방치하면 알 수 없는 꽃이 피어나
장맛은 근심으로 부글부글 끓어올랐지
구름이 가까이 다가오면
비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옥상 계단을 오르는 어머니는
씨간장을 지키며 늙어가지
간장 항아리는 바다와 하늘과 땅을 품고
깊고 오묘하게 깊어가지
간장이 바닥날 즈음 저 혼자 둥둥 떠서
지구 밖으로 날아가는
쪼글쪼글한 달을 본 적도 있어
그래서일까 처음 떠온 간장에서는
보름달 맛이 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흰빛을 우려낸 간장은 칠흑이 되어갔지
푹푹 찌는 폭염 같은 찌개나 국에 저 칠흑을 넣으면
입안 어디에서 환하게 밝아오는
달의 맛을 볼 수 있지
―시집『그런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 것』(상상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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