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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류인서

여우 류인서 재 하나 넘을 적마다 꼬리 하나씩 새로 돋던 때 나는 꼬리를 팔아 낮과 밤을 사고 싶었다 꼬리에 해와 달을 매달아 지치도록 끌고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꽃을 샀다 새를 샀다 수수께끼 같은 스무고개 중턱에 닿아 더이상 내게 팔아먹을 꼬리가 남아 있지 않았을 때 나는 돋지 않는 마지막 꼬리를 흥정해 치마와 신발을 샀다 피 묻은 꼬리 끝을 치마 아래 감췄다 시장통 난전판에 핀 내 아홉 꼬리 어지러운 춤사위나 보 라지 꼬리 끝에서 절걱대는 얼음 별 얼음 달이나 보라지 나를 훔쳐 나를 사는 꼬리는 어느새 잡히지 않는 나의 도둑 당신에게 잘라준 내 예쁜 꼬리 하나는 그녀 가방의 열쇠고리 장식으로 매달려 있다 ―시집『여우』(문학동네, 2023)

의자 /이돈형

의자 이돈형 헌 집 같은 의자에 앉아 헌 집에 든 바람 같은 아버지가 담배를 태우신다 어쩌다 또 한 대 태우신다 공복에 태우는 담배 맛은 정든 소멸처럼 애태움을 가시게 해 내뿜는 연기가 생의 뒷주머니 같은 골목에 퍼지다 종일 담벼락을 옮겨 다니며 중얼거린 의자의 그림자에 가 앉는다 어쩌다 하루란 게 있어 의자는 허虛의 혈穴을 찾아 하루치 삭고 아버지는 하루치 삶을 개어놓는다 어둑한 골목의 기색을 덮고 있는 두 그림자 위로 석양이 쇳물처럼 쏟아진다 아무데서나 문드러지기 좋은 저녁 아버지 의자에 앉아 소멸만 내뿜는다 내뿜어도 자꾸 생을 일러바치듯 달라붙는 정든 소멸은 무얼까? 아버지, 담배 맛이 그리 좋아요? ㅡ반년간 《상상인》(2023, 1월), 제3회 선경문학상 수상작 중

Nothing ㅡ5분 /​​최문자​​

Nothing ㅡ5분 ​​ 최문자​ ​ 5분이 중요하다. 나와 싸우러 올 사람이 있었다 5분 후 그가 온다고 했다. 5분후 나는 그 사람에게 분명 성내야 한다. 초침이 깜빡거리며 5분은 온통 날카롭다. ​ 모든 흔들림과 정지 사이로 5분이 재깍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5분에 고구마가 구어지거나 오이가 길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5분 안에 연인은 숨을 거두고 그 병원에선 세명이 더 죽는다. 5분을 기다리는 동안 TV 에선 갖 태어난 어린 말이 비린내 나는 태막 을 벗고 아므르 강가를 뛰었다 목마름을 느끼는 곳으로 간다. 불과 세 상을 딛은지 5분만의 일이다 5분은 깨지기 전 가장 진한 슬픔 숨을 팽팽하게 들이마셨다. 그는 5분 안에 내 입을 빨리도 가져갔다. 그 날 나는 성내지 못했다. ―계간『학산문학』(20..

카테고리 없음 2023.02.17

시계의 아침 /최문자

시계의 아침 최문자​ ​ 가끔 ‘정의’ 라는 말 두꺼운 텍스트 속에서 읽는다 내게 시간이 잘 도착하는 시계가 있다 내것 아닌 감정으로 시계는 가고 있다 나는 그 때 일을 시계에게 말하려고 했다 시계의 얼굴이 하얗다 질려있다 내가 나쁜 손을 잡으면 시계가 죽었다 나를 발견하듯이 깜짝 놀라며 시계를 발견한다 시계를 들여다 본다 12시였다 지난 토요일도 시계는 한 번 죽었었다 죽음 후, 숫자 1에서 12개의 뼈가 휘어져 있다 숫자 2는 1을 떠안고 까마득한 자전의 길을 떠난다 네가 나였으면 좋겠어, 네가 그 냥 너였으면 좋겠어 두 가지 감정의 바늘이 갈길 가면서 정하지 못하고 있다 숫자 1과 숫자2 사이 좁은 허공에서 조금 늦거나 조금 빠른 시간이 웃고 또 웃는다 한때 나는 자주 웃던 무례한 시계를 강변에 버..

개는 어디에 있나 /김기택

개는 어디에 있나 김기택 아침에 들렸던 개 짖는 소리가 밤 깊은 지금까지 들린다 아파트 단지 모든 길과 계단을 숨도 안 쉬고 내달릴 것 같은 힘으로 종일 안 먹고 안 자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 슬픔으로 울음을 가둔 벽을 들이받고 있다 아파트 창문은 촘촘하고 다닥다닥해서 그 창문이 그 창문 같아서 어저께도 그저께도 그그저께도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주민들 같아서 울음이 귓구멍마다 다 돌아다녀도 개는 들키지 않는다 창문은 많아도 사람은 안 보이는 곳 잊어버린 도어록 번호 같은 벽이 사람들을 꼭꼭 숨기고 열어주지 않는 곳 짖어대는 개는 어느 집에도 없고 아무리 찾아도 개 주인은 없고 짖는 소리만 혼자 이 집에서 뛰쳐나와 저 집에서 부딪히고 있다 벽 안에 숨어 있던 희고 궁금한 얼굴들이 베란다에 나와 갸웃하는데 ..

5인실 /김기택

5인실 김기택 아까부터 침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는데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한평생이 가고 있다. 삐끗하면 어딘가 부러질 것 같은 허리를 일으키는 일에 삶의 모든 것이 걸려 있다. 침대에서 다 일어난다면 그동안 없었던 발이 나와 떨리는 슬리퍼를 신을 것이다. 하면 된다는 일념이 링거 거치대를 밀며 코앞의 머나먼 화장실로 갈 것이다. 누군가 먼저 들어가 있는 화장실에서는 오줌 소리는 들리지 않고 끙끙거리는 소리만 끈질기다. 건너편 침대에서는 요도에 관을 넣어 피 섞인 오줌을 빼내는 투명 플라스틱 통이 있다. 벌건 오줌이 반쯤 차 있다. 그 옆에는 일생일대의 힘을 쥐어짜 숨 쉬는 침대. 또 그 옆에는 기계로 목구멍 찰거머리 가래를 빼는 침대. 모터 소리에 맞추어 내지르는 지루한 비명. 그 소..

자매들 /이우걸

자매들 이우걸 쟁반에 담긴 소란이 몇 차례나 들락거려도 거실의 불빛은 꺼질 줄을 모른다 핏줄을 타고 흐르는 강물은 하염없다 막내가 장난삼아 돌팔매를 던지면 언니들도 덩달아 돌팔매를 던져서 파문은 웃음이 되고 또 때로는 울음이 되고 얘기가 잦아들 무렵 창밖에는 비가 내린다 빗소리는 추억들을 다시 불러내지만 새벽이 닿을 때쯤엔 엉킨 채 잠이 든다 ―시조집『이명』(천년의시작, 2023)

나의 투쟁 /임보

나의 투쟁 임보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고 나와 싸웠다 그래서 나는 지금껏 패배를 모른다 나는 돈이 아닌 말을 얻기 위해 싸웠다 그래서 나는 몇 권의 시집을 얻었다 나는 명예가 아닌 명분을 위해 싸웠다 그래서 나에겐 아직 큰 적이 없다 80을 넘어선 이젠 싸울 상대가 없다 모두가 다 내 상전임을 비로소 알았다 ㅡ 『POSITION』(2022, 가을호)

오프런 /김영철

오픈런 김영철 주머니에 손을 넣은 기다림은 하나도 없다 포켓몬 빵을 그리는 뱀보다 훨씬 긴 시간 책이나 팔짱을 낄 때 '뮤'가 오지 않을까 꿈마저 곤히 잠든 기억 저편 창고에서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스스 눈 뜬 아이 선명한 에움길 따라 먼지를 내며 온다 아이는 어른이 되고 청춘은 백발 되어 마냥 좋은 눈빛으로 깡충깡충 뜀을 뛰는 똑 닮은 토끼를 위한 초록 마당을 펼친다 ㅡ 『시와소금』(2022,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