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12358

개는 어디에 있나 /김기택

개는 어디에 있나 김기택 아침에 들렸던 개 짖는 소리가 밤 깊은 지금까지 들린다 아파트 단지 모든 길과 계단을 숨도 안 쉬고 내달릴 것 같은 힘으로 종일 안 먹고 안 자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 슬픔으로 울음을 가둔 벽을 들이받고 있다 아파트 창문은 촘촘하고 다닥다닥해서 그 창문이 그 창문 같아서 어저께도 그저께도 그그저께도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주민들 같아서 울음이 귓구멍마다 다 돌아다녀도 개는 들키지 않는다 창문은 많아도 사람은 안 보이는 곳 잊어버린 도어록 번호 같은 벽이 사람들을 꼭꼭 숨기고 열어주지 않는 곳 짖어대는 개는 어느 집에도 없고 아무리 찾아도 개 주인은 없고 짖는 소리만 혼자 이 집에서 뛰쳐나와 저 집에서 부딪히고 있다 벽 안에 숨어 있던 희고 궁금한 얼굴들이 베란다에 나와 갸웃하는데 ..

5인실 /김기택

5인실 김기택 아까부터 침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는데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한평생이 가고 있다. 삐끗하면 어딘가 부러질 것 같은 허리를 일으키는 일에 삶의 모든 것이 걸려 있다. 침대에서 다 일어난다면 그동안 없었던 발이 나와 떨리는 슬리퍼를 신을 것이다. 하면 된다는 일념이 링거 거치대를 밀며 코앞의 머나먼 화장실로 갈 것이다. 누군가 먼저 들어가 있는 화장실에서는 오줌 소리는 들리지 않고 끙끙거리는 소리만 끈질기다. 건너편 침대에서는 요도에 관을 넣어 피 섞인 오줌을 빼내는 투명 플라스틱 통이 있다. 벌건 오줌이 반쯤 차 있다. 그 옆에는 일생일대의 힘을 쥐어짜 숨 쉬는 침대. 또 그 옆에는 기계로 목구멍 찰거머리 가래를 빼는 침대. 모터 소리에 맞추어 내지르는 지루한 비명. 그 소..

나의 투쟁 /임보

나의 투쟁 임보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고 나와 싸웠다 그래서 나는 지금껏 패배를 모른다 나는 돈이 아닌 말을 얻기 위해 싸웠다 그래서 나는 몇 권의 시집을 얻었다 나는 명예가 아닌 명분을 위해 싸웠다 그래서 나에겐 아직 큰 적이 없다 80을 넘어선 이젠 싸울 상대가 없다 모두가 다 내 상전임을 비로소 알았다 ㅡ 『POSITION』(2022, 가을호)

구피*의 하루 /장영춘

구피*의 하루 장영춘 온종일 어항 속 태평양을 건너듯 출구 없는 레일 위를 돌리고 돌려도 또다시 제자리걸음 그물 속에 갇힌 오늘 한때는 네 어머니도 종종걸음치셨지 한여름 용천수에 발 한번 담글 새 없이 어머니 움푹 팬 발자국 이끼처럼 떠 있는 저들도 속수무책,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저출산 막대그래프 눈금을 채워가듯 한 달이 멀다 하고는 쏟아내는 새끼들 *구피 : 열대어 ―『시와소금』 (2022, 겨울호)

당신堂神을 찾던 당신 –해안동, 동당 /장영춘

당신堂神을 찾던 당신 –해안동, 동당 장영춘 누구의 손길이었나 근원을 찾던 발길 미끄덩 넘어지며 무심의 단죄를 받듯 풀더미 허리 헤치며 길 없는 길을 간다 아침 이슬 밟으며 당신堂神을 찾던 당신 지성으로 빌었던 간절함도 녹이 슬어 다 식은 제단 둘레에 표지석 하나 없는 당신堂神은 거기 있는데 당신은 거기 없고 덩그러니 하늘 향해 손 내밀던 팽나무 아래 해안동 하르방당에 상사화꽃 피었다 ―『시와소금』 (2022, 겨울호)

간절기​ /채종국

간절기 ​ 채종국 ​​ ​ 헨델의 아리아를 듣는 아침 ​ 봄눈처럼 어색한 말을 하는 아침 ​ 마스크를 벗고 가지에 싹 튼 권태를 읽는다 ​ 권태라는 것은 봄이 올 수도 있다는 말의 또 다른 텍스트 ​ 나른한 온기에 꼬리를 감춘 고양이처럼 ​ 담장 너머 숨어버린 검은 모습의 겨울 애상을 찾는다 ​ 네모 난 새의 울음 눈 속에 갇히고 허공에 걸려있는 부음 같은 햇살 몇 줄 ​ 저를 구원하라며 봄을 기다리는 가녀린 나무의 간절한 손처럼 봄은 곧 부르짖는 자의 응답이라 하지만 ​ 바람 한 점 없는 겨울 아침 시퍼런 하늘은 그러한 간절도 모르는 채 나무의 마른 기도를 태우는 중이다 ​ ​ ​​ ―웹진『시인광장』(2023, 2월호)

오렌지에게​ /최문자​​​​

오렌지에게 ​ 최문자​ ​​ ​ 사랑할 때는 서로 오렌지이고 싶지 먼 곳에서 익고 있는 어금니가 새파란 ​ 이미 사랑이 끝난 자들은 저것이 사랑인가 묻는다​ ​ 슬픈 모양으로 생긴 위험하게 생긴 느린 비가 부족해서 파랗게 죽을 지도 모르는 저것 사랑하기에 좋도록 둥근, 바람에 대해 쓰러지기 좋은 죽기에도 좋은 저것 ​ 우리는 쓰러지기도 전에 겁이 나서 ​ 오렌지는 너무나 굳게 오렌지를 쥐고 나는 어디에도 없는 나를 쥐고 ​ 짐승처럼 나빠지고 싶은 오 두려운 여름, 거짓으로 빚어지는 둥그런 항아리 같은 저것 저것의 안을 깨뜨리며 ​ 죽었던 여름이 우리를 지나갔다 ​ ​​ ―웹진『시인광장』(2019, 3월호)

고욤나무 /김정임

고욤나무 김정임 키 큰 고목에 닥지닥지 열렸던 작은 씨 열매 대추처럼 매달려 검붉게 영글어가는 고욤나무 작은 몸속에 씨앗을 품어 우수한 유전자를 전하기 위해 매서운 세상에 맞섰다 생명이란 한 생애를 와서 본연의 책임을 다하고 다음 세대를 위해 텃밭을 일구어 두고 홀연히 떠나는 것 유전자로 꽉 채워 붉어질 수도 없는 고욤나무의 삶이 열정으로 터질 듯하다 ―시집『바다로 간 낙타』해설(그림과책, 2003)

부메랑 /김정임

부메랑 김정임 누군가는 행복한 일상을 또 누군가는 시련의 오늘을 살아내고 한없는 기쁨과 슬픔의 교차로에 환희와 눈물의 쌍곡선을 타고 인내라는 이름의 힘겨운 나날 심연의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내 편의 나를 한없이 질책하다가 원망의 화살 날려보았다 아 아 그것은 나를 겨냥한 아픈 삼지창이었다는 걸 마루타의 처참한 최후처럼 심장에 찍힌 상처가 발등 찍으며 소리 없는 눈물 쏟아내고 있다 ―시집『바다로 간 낙타』해설(그림과책, 2003)

새를 가둔 항아리​ /임희숙​​

새를 가둔 항아리 ​ 임희숙 ​ ​ 무서워요 발톱이 걸렸어요 누가 발가락을 물고 놓아주질 않아요 알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죠 깨뜨리겠어요 항아리 작고 겸손한 부리라고 얕본 거죠 침묵하는 부리가 얼마나 험악한지 모가지가 독사를 닮았다는 걸 잊으셨나요 백자청화봉황무늬 항아리 나를 가둔 손가락을 분지르고 뱀의 모가지로 칭칭 감아버리려구요 유리질이 녹아내려 날개가 젖네요 까짓 그래도 부수고 말거에요 내동댕이쳐야죠 드디어 나는 떠납니다 안녕 이런, 날개가 젖었다는 걸 깜빡했어요 항아리를 깨뜨리라고 파괴해야 한다고 제발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 유약에 젖은 발톱이 녹아내리고 있어요 죽어야만 깨지는 알이라면 까짓 그런데 내가 죽으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거죠 항아리 밖의 세계는 어디에 있나요 대답해요 당장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