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12358

서쪽​ /홍일표​​

서쪽 ​ 홍일표 ​ ​ 빛을 탕진한 저녁노을은 누구의 혀인지 불붙어 타오르다가 어둠과 연대한 마음들이 몰려가는 곳은 어느 계절의 무덤인지 돌의 살점을 떼어낸 자리에 묻혀 숨 쉬지 않는 문자들 하늘은 돌아서서 흐르는 강물에 몸 담그고 돌멩이 같은 발을 씻는다 밤새 걸어온 새벽의 어두운 발목이 맑아질 때까지 딛고 오르던 모국어를 버리고 맨발로 걸어와 불을 밝히는 장미 몇 번의 생을 거듭하며 붉은 글자들이 줄줄이 색을 지우고 공중의 구름을 중얼거리며 흩어 진다 마음 밖으로 튀어나온 질문이 쓸쓸해지는 해 질 녘 걸음이 빨라진 가을이 서둘러 입을 닫는다 뼈도 살도 없이 오래된 이름을 내려놓고 날아가는 구름 비누거품 같은 바람의 살갗이라고 한다 허공을 가늘게 꼬아 휘파람 부는 찌르레기 입술이 보이지 않아 아득하다는..

늦게 오는 사람 /이잠

늦게 오는 사람 이잠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 말없이 마주 앉아 쪽파를 다듬다 허리 펴고 일어나 절여 놓은 배추 뒤집으러 갔다 오는 사랑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순한 사람을 만나 모양도 뿌리도 없이 물드는 사랑을 하고 싶다 어디 있다 이제 왔냐고 손목 잡아끌어 부평초 흐르는 몸 주저앉히는 이별 없는 사랑 어리숙한 사람끼리 어깨 기대어 졸다 깨다 가물가물 밤새 켜도 닳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다 내가 누군지도 까먹고 삶과 죽음도 잊고 처음도 끝도 없어 더는 부족함이 없는 사랑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뜨거워서 데일 일 없는 사랑을 하고 싶다 살아온 날들 하도 추워서 눈물로 쏟으려 할 때 더듬더듬 온기로 뎁혀 주는 사랑 —시집 『늦게 오는 사람』 (파란..

개기일식 /이우디

개기일식 이우디 천만년 전 홈질해 둔 달빛 실밥이 풀린 날 우연 아닌 운명이라고 말하던 너의 눈빛이 에피소드 하나 풀어놓듯 수천수만 어느 하루 좋은 기억이 마시멜로 맛 보드라운 이야기를 실시간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생중계하는 느낌이다 교차 편집된 화면 속에서 우리 빈틈없이 하나가 된 날 목덜미 간질이던 입김이 서로의 마음 인터뷰하듯 너의 눈동자 속으로 사라진 퍼포먼스는 멜로 미침을 나눔, 하던 시절이 만든 자리에서 말랑해진 어둠과 빛 이해한 듯 떠나지 못한 뼈만 남은 설렘, 에 어떤 마법을 쓸까 잃어버리지 못한 너, 이후 잊힐 리 없는 기억 달꽃의 콘서트_소원을 시작해 봐 마지막은 오지 않는다 기다림에 물 주는 날을 시작할 뿐 꽃이 필 때거나 질 때거나 뻔뻔한 세금처럼 대가가 필요하거든 다른 듯 같은 인..

다도해 /전병석

다도해 전병석 외로운 사람이 바닷가에 서서 수평선을 향해 외로움을 던지면 수평선을 넘지 못한 외로움은 솟아올라 섬이 된다 작은 외로움은 작은 섬으로 더 큰 외로움은 더 큰 섬으로 저 많은 다도해의 섬은 외로운 사람이 던진 외로움이다 외로움을 모르거나 외로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섬과 섬 사이에 다리를 놓지만 외로움을 알거나 외로움을 사랑하는 사람은 섬과 섬 사이에 외로움을 놓는다 눈물은 눈물로 위로하듯이 외로움은 외로움만으로 건널 수 있다 다시는 건널 외로움이 없을 때 비로소 외로움은 수평선을 넘어간다 보라, 저 많은 다도해의 외로운 사람이 던진 외로움을 ㅡ시집 『화본역』(문학청춘, 2022)

가을 서정 /이종곤

가을 서정 이종곤 나의 구월은 바이러스가 먹었다 목구멍 너머 모스크의 아잔이 된 기침은 빚쟁이처럼 시월로 이월되었을 뿐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계절이 오가는 하늘은 잠시 구름 위로 내려앉아 부유하는 생각들 비로 침전시켜 자꾸 허기가 지는 거리 다시 생각은 단풍 든 숲으로 간다 지금은 오색딱따구리도 집을 짓지 않고 어느 새 기우는 햇빛에 구도하는 수도승 찬란했던 초록의 꿈을 접고 그리움과 아쉬움의 혼혈들이 조용히 반성하는 시간 거기 한 자리에 언제부터 서 있었나 모진 풍파를 딛고 다만 흔들릴 뿐 인고의 물관을 지나면 풍요로운 이 계절 무리로 피어 깊은 향기 내뿜는 산국을 보라 ―계간『詩하늘 108』(2022년 겨울호)

물소리 /유계자

물소리 유계자 철퍽철퍽 한나절 수차를 밟는 염부의 걸음이 방금 걷어 올린 미역처럼 후줄근하다 소금창고 가는 길, 짊어진 소금가마가 기우뚱 바닷물 저장고에 떨어져 버렸다 염천에 점심이나 먹고 건져야겠다며 담배 한 대 피우고 소금을 찾으러 갔더니 빈 가마만 동동 바닷물이 낳은 소금 서둘러 왔던 곳으로 돌아가 버리고 선술집에서 만난 소금꽃 같던 여자 날 못 믿느냐며 가을 함초 같이 붉은 입술로 평생 수차의 지팡이가 되어주겠다던 그 여자 소금처럼 짜디짠 눈물까지 저당 잡히고는 걸음을 지워버렸다 수차를 굴리다가 수차례 사금파리 같은 이름 다 잊었노라 염판에 엎드려 저녁노을에게 큰소리치다가 철벅철벅 세상은 잘도 돌아가는데 온종일 돌아도 염천은 염전 맨발의 염부는 딱 한 번 염천을 벗어나 바다로 돌아가고 세상에서 건..

오늘의 레퀴엠 ​/우남정

오늘의 레퀴엠 ​ 우남정 붉은 뿌리를 잘라내고 소금물에 데친 주검을 먹는다 등뼈에 칼집을 넣어 발라 회친 주검을 먹는다 가마솥에 고아 낸 흐물거리는 주검을 먹는다 주검은 뜨겁고 달콤하고 비릿하다 꽃무늬 접시에 주검을 올린다 주검에 고명을 올린다 마트에서 순교한 죽음들을 세일하고 있다 신선한 주검을 고른다 누군가의 주검을 먹고 누군가의 죽음이 자라난다 무덤에 돋아나는 오랑캐꽃 사랑한 것들의 주검에 꽃이 핀다 죽음의 젖을 물고 푸른 상수리 나뭇잎에서 눈물이 반짝 빛난다 나는 배가 고프다 네 영혼의 마지막까지 갉아먹고 떠나려, 작정한 듯 ―시집『뱀파이어의 봄』(천년의시작, 2022)

오래된 끝에서​ /우남정

오래된 끝에서 ​우남정 ​ 흘러넘치듯 능소화가 담벼락에 매달려 있다 열매는 꽃에 매달리고 꽃은 줄기에 매달리고 줄기는 뿌리에 매달린다 뿌리는 지구에 매달려 있고 지구는 우주에 매달려있다 매달린 것을 잊고 매달려 있다 산다는 것이 매달리는 것일까 저 여자의 가슴에 젖이 매달리고 등에 아이가 매달리고 팔에 장바구니가 매달리고 장바구니는 시장에 매달리고 저 여자는 집에 매달려 있다 손가락은 카톡에 매달려 있고 수많은 당신에 매달려 있다 당신은 씨줄과 날줄, 그물에 매달려 있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오래된 슬픔이 묻어난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핏방울이 맺혀있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굴욕의 기미가 있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솟구치다’의 그림자가 매달려 있다 그 끝에 거꾸로 솟은 종유석이 자란다 매달리는 ..

능소화 /이동화

능소화 이동화 능소화 진다 한 세계가 닫혀야 또 한 세계가 열리는 까닭을 당신은 알고 있었을까 해 뜨고 바람이 불어오는 곳 고사목이 된 늙은 아버지 검은 몸 안에서 새들도 슬프게 저물어가고 있다 새순을 열고 꽃을 피우고 푸른 계절을 넝쿨로 채우던 시간이 나무의 바깥을 향하는 길이었으니 단 한 번의 풍요를 위해 마음은 얼마나 더 가난해져야 하는가 꽃 진다고 나를 당신의 바깥이라 말하지 말라 능소화 질긴 넝쿨손처럼 치열했던 당신 맨땅 위에 뒹구는 통꽃처럼 삶은 허망하여도 아름답게 가는 여름 있으니 ―계간『열린시학』(2022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