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12358

어쩌다 지하에 들다 /최연하

어쩌다 지하 최연하 유빙처럼 떠도는 영혼들 널빤지 위에 웅크린 잠 신문지로 불안한 잠을 덮고 가슴속 상처를 감추고 있습니다 시멘트 바닥의 냉기보다 가족에게서 잊히는 것이 더 두려운 사람들 술병을 아내처럼 끼고 삽니다 경로를 이탈한 오작동을 누가 복원해 줄 수 있을까요 바닥에서 몸 하나 일으켜 세우지 못하는 무기력에 점점 음지가 되어갑니다 해를 등지고 멀리 와 버린 사람들 과거로 페달을 돌려보지만, 눈을 뜨면 늘 제자리에 멈춰있습니다 한 줌 햇살이 아쉬운 깊은 지하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역 하나를 붙잡고 빙빙 돌고 있습니다 ㅡ계간 《열린시학》 (2022, 겨울호)

젓가락을 놓으며 /이상길

젓가락을 놓으며 이상길 십원짜리 지폐 두 장이 오천원이 넘도록 반 백년을 넘게 비워 온 짜장면 한 그릇 시커먼 춘장 돼지기름에 달달 볶아 양파며 감자 고기 몇 점 고소하게 씹히던 그 옛날 맛은 아니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아버지가 사주시던 기억에 가끔은 애틋해지고 이제는 그때의 당신보다 더 늙어버린 씁쓸히 웃으며 비우는 오늘 또다시 짜장면 한 그릇 ―계간『詩하늘 108』(2022년 겨울호)

달과 고래 /김영순

달과 고래 김영순 일부러 그대 안에 며칠씩은 갇힌다 행원리 어등포구 일곱물이나 여덟물쯤 기어코 월담을 하듯 원담에 든 남방돌고래 섬 뱅뱅 돌다 보면 거기가 거기인데 마을 장정 서너 명이 내쫓아도 들어온다 네게도 피치 못할 일 있기는 있나보다 저 달은 하늘에서 들물날물 엮어내고 저렇게 하늘에서 한 생명 거느린다 내 생애 참았던 그 말 물숨이듯 뿜고 싶다 ―『시와소금』 (2022, 겨울호)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박숙경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박숙경 금계국 떠난 옆 자리에 기생초 꽃 피운 걸 보면 가뭄에 말라가는 실개천에서 하루만큼의 목숨을 연명하는 왜가리와 마주치면 모노레일 위에서 자리를 옮겨 다니는 까치들을 보면 큰 물 지나가면 허물어질 걸 짐작하면서도 정성껏 돌탑을 쌓은 이의 마음이 느껴지면 오래전 수레국화 피었다 진자리에 다시 수레국화 철없이 피어난 걸 보면 시멘트 담벼락을 위로만 오르는 담쟁이넝쿨을 보면 걷다가 지쳤을 때 이마를 만지고 가는 몇 올의 바람을 생각하면 꽃 피어 어디에 쓰일까 싶어도 나비한테 무당벌레한테 꽃술을 내놓은 꽃의 풍경에 비하면

눈사람

눈사람 임양호 밤사이 누가 왔나 봐요 문밖이 수북하네요 하지 못해 빛났던 말들이 저렇게나 많은 양 어둠에 기댄 순결의 높이가 참 놀랍네요 그 기다랗던 밤에 잠도 오지 않았던 것은 소리 없이 오는 그대 발자국에 귀 기울이다 동짓날 새알심같이 마음만 웅크려 하얗게 동그래졌잖아요 이 계절이면 하나씩 눈 속에서 애인들이 움트는데요 이행치 못한 하얀 약속의 페이지 같아요 모든 언약들을 펼쳐놓고 얘기 좀 해봐요 눈동자에 서로의 모습만 비추어 보며 안아주면 녹아 사라질까 마음에만 머물기로 해요 그럼 전설은 처마 밑 거꾸로 커가는 고드름의 그리움만 같아서 언젠가 제 무게로 떨어져 심장을 쑤시고 들어올 거예요 그땐 아리고 아파 녹아 없어졌다 말하진 못할 거예요 생의 흐린 날에 만나 맑은 날에 사라지는 눈사람 애인 ―『시..

씨앗젓갈 /이명희

씨앗젓갈 이명희 대명항 젓갈 판매소 씨앗젓갈 글자가 나를 끌어당겼다 어떤 씨앗으로 담은 젓갈일까 궁금해 사 온 씨앗젓갈 날치알 청어알 명태알, 호박씨 해바라기씨가 섞여 있다 바다에 알을 뿌리지 못하고 들로 나가 싹을 틔우지 못하고 짜디짠 젓갈이 되어 씨앗인 척 이름만 지닌 저것들 사람의 몸에 씨를 뿌린다 나는 이미 죽은 씨앗을 삼킨다 헤엄치지 못한 수많은 명태가 내 몸에서 아우성친다 한때 씨앗 창고였지만 씨앗을 뿌릴 수 없는 몸 그들이 힘을 주며 일으켜 세운다 저 죽은 씨앗을 먹고도 우리는 살아간다 씨앗은 죽어서도 산다 ―시집『바람의 수첩』(시산맥, 2022)

월동 /김이듬

월동 김이듬 폐쇄하고 싶었을 것이다 일 년 중 며칠이라도 문을 닫아걸고 싶었을 것이다 호수는 수면이 온통 문이라서 비가 오면 비를 받고 바람 불면 물결치기 바빴다 빵 부스러기나 쓰레기를 던져 넣어도 막을 수 없었다 첨벙첨벙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새와 구름과 측백나무까지 사방에서 투신하는 그것들을 사랑했다 단지 얼비치는 그림자인 줄 모르고 내부는 언제나 번잡했다 찬란했던 수련 군락도 다정했던 청둥오리 떼도 한때였다 문득 호수는 고마웠을 것이다 몰아닥친 한파가 그날 밤 호수는 얼어붙었다 이튿날 폭설까지 쏟아져 호수는 새하얗게 뒤덮었다 바깥에서는 전혀 호수 내부가 보이지 않았을 때 호수는 투명하게 내면을 응시하는 듯했다 비로소 무문관이 되어 자기 안에 서식하는 침묵을 보았다 스스로 수질을 살폈고 시꺼메진 ..

할미새한테서 전화가 왔다 /박희선

할미새한테서 전화가 왔다 박희선 늙은 소나무에 세 들어 사는 할미새 할미한테서 아침 일찍 전화가 왔다 집안에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왜 보름째나 밭에 올라오지 않느냐 몹시 궁금해서 전화를 했단다 아내가 몸이 안 좋다고 했더니 지난봄에 큰 수술한 곳이 지금도 많이 아프냐고 되물었다 감나무와 호두나무 대추나무들 고라니와 멧돼지, 곤줄박이와 콩새 산비둘기까지도 내가 보고 싶어 모두 안달이 났다고 하얀 거짓말까지 보탰다 우리 보리밭은 잘 있느냐고 물었더니 며칠 전에 고라니 큰삼촌이 돌아가셔서 온 집안이 조용히 보낸다고 말했다 지난 장날부터 호두나무 옆에 도라지꽃들이 만발했는데 자기는 보랏빛 꽃보다 흰 꽃이 더 예쁘다면서 혼자 웃었다 ―시집「할미새한테서 전화가 왔다」(詩와에세이, 2021)

눈사람의 기분 /하린

눈사람의 기분 하 린 어떻든 사람입니다 천사가 아닙니다 마당이거나 골목이거나 언덕이거나 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랫목은 어디입니까 고드름은 왜 생깁니까 그것이 궁금하다면 당신은 백색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로부터 주관성을 부여받았습니다 눈 속의 눈이 생길 수 있고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 많은 감정이 없습니다만 특별한 비밀이 있습니다 적막과 대면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뼈와 살과 피와 심장과 마음이 하나라는 착각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아이가 잠든 사이에 길고양이를 찾아 나설 참입니다 나를 보고 놀라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물어볼 것입니다 벌벌 떨고 있는 배고픈 새끼 고양이를 만난다면 처음으로 울 것입니다 그만 녹아 흐를 것입니다 머리가 재빨리 심장에 달라..